요즘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이 조금 안 되는 과거의 한 시점에, 나는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발단은 영화 <레옹>이었다. 그 영화가 나에게 준 여운은 대단했기에, 나는 영화라는 것에 그렇게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평생을, 이 대단한 매체에 몸 담으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지금까지도 그것은 내 삶의 강력한 추동력 중 하나이다. 내가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쓰고 있다면, 영화를 더 재밌게 보고, 나아가 좋은 영화를 단 한 편이라도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십 년 전 그 시점에 내 삶에 찾아온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이다. 비록 영화가 나의 가장 친애하는 매체일지라도, 언제나 나의 보물 1호는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이었다. 요새는 그분의 작품이 거의 다 복간이 되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천만다행이다. 그분의 작품들은 십대 시절 나의 감수성과 정서를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러하다.


<레옹>은 분명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그게 다다. 상업영화로서 그만한 성취도 대단한 것이긴 하다. 그래도 그 영화는 결국 그 정도다. 그러나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은 나에게 만화란 무엇인가를 넘어서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려주었다. 당연히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십대 시절의 나는 참을성이 좋지 않았다. 내가 다 읽어낸 책은 손에 꼽았고, 그런 방정맞은 독서법을 가진 나에게 재독, 삼독을 하게 만든 책이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이다. 그 작품들을 수없이 읽어내면서 나는 예술가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인물을 자기 마음껏 주무르는 경악스러운 광경을 끊임없이 목격하며 자라왔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창작을 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고우영 선생님이 정답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분의 방법과 깊이는 절대적이다. 아마 나는 평생 고우영 선생님을 모방하며 살아갈 것 같다.


'내가 요즘 왜 이렇게 글을 많이 읽고 써댈까'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마구 적어내려가는 이 글은, 고우영 선생님에 대한 본격적인 글이 아니다. 그냥 손 가는 대로 쓰는 것일 뿐, 그분의 대표작인 <일지매>,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등등에 대해 언급하려면 아직 이 정도의 분량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반의 반도 못 담아낸 것이다.


고우영 선생님 외에도 윤태호, 박시백, 박흥용, 이노우에 타케히코 같은 만화가들이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걸작을 구상하거나 만들고 있을 전 세계의 수많은 영화감독들 역시 그러하고, 김훈이나 황석영 같은 문필가들 또한 나를 길러주고 있다. 하지만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나의 인생과 시야를 바꾼 단 한 명의 예술가. 그 사람은 근 십여 년간 나에게 예술을 가르쳐왔고, 지금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반드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고우영 선생님이다. 나는 아직도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을 넘어서는 그 어떤 창작물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 글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 영화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고우영 선생님었다는, 앞선 단락과는 주제가 맞지 않는 이상한 글이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감독이 하고 싶지, 만화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영화 역시 고우영 선생님 못지 않은 하나의 축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다소 텐션이 올라가 있는 글을 썼다. 나중에 반드시 나의 시간과 능력을 내어서 고우영 선생님과 그분의 작품들을 소개해드리겠다. 그때에는 지금보다는 좀 더 차분하게 쓸 수 있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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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수학

리뷰/책 2015. 3. 28. 20:27

우리는 보통 수학을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해서 학교를 떠나는 순간 더 이상 수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수학이란 셈이고 기술이다. 무엇보다 입시라는 문의 너비를 결정하는 도구라는 인식이 사회에 만연하다. 수학은 문과와 이과의 선택을 도와주는 가늠자이기도 하며, 과외 시장에서 언제나 1위를 다투는 인기 종목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로 수학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민음인에서 2014년에 출판한 <문명과 수학>은 EBS의 <다큐 프라임>이 2011년에 방송한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이 다큐멘터리는 수학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 조금은 다른 입장에서 살펴본다. 지금껏 우리가 너무 기능적인 측면에서 수학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놓쳤던 부분을 조명하려는 이 기획은, 세계의 원리에 대한 청사진으로서의 수학을 소개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사교육의 대항마이자 지금도 수많은 입시생들에게 기능으로서의 수학을 소개하는 EBS에서 만들어낸 다큐멘터리이기에 더 흥미로운 면이 있다.


문명의 발달사는 곧 수학의 발달사임을 밝히는 이 책은, 문명이 제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식으로 수학의 발전을 요구해왔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이 기획은 고대 이집트의 초보적인 도량법, 저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음률(音律)의 발견, 미적분의 탄생과 우주의 모형을 궁구하는 첨단의 수학에까지 문명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수학을 알게 해준다. 문명은 대개 자연의 반대어로서 사용된다. 수학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자연의 원리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학이 역설적으로 자연에 반대되는 문명을 팽창시켜왔다. 이런 아이디어에까지 이르게 되면, 왜 수학이 철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학문인지 납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두 학문은 모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열심히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 어느 학문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피타고라스의 음률의 발견과 관련하여 생각할 것이 있다. 음률이란 바른 음에 대한 탐구이고, 바른 음이란 옳지 못한 음의 존재를 암시한다. 자기의 이름을 딴 정리로 만세에 이름을 떨친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이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만물은 모두 어떤 비례의 관계에 놓여져 있다고 생각했다. 바른 음과 옳지 못한 음을 규정한 음률이 대표적이다. 실로 이 세상에는 음악이나 직각삼각형의 세 변을 비롯해서 수많은 비율들이 존재한다. 그 비율들은 칼 같아서, 진정 이 세상은 수로 이루어져 있음을 실감하게 하기도 한다. 계량이 가능한 영역 밖에 있는 것들조차도 수학적인 감성을 건드리는데, 이른바 연인들의 밀당이라는 것 역시 밀고 당김의 황금률을 구하는 것 아니겠는가. 중용의 미덕 역시 산술적이든 비산술적이든 모두 넘침과 모자람 사이에 있는 어떤 알맞은 비율을 논하고 있다. 정말 세상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횡행하는 요즘에야 황금률이라든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보편적인 무언가에 대해서는 이전에 비해 다소 시큰둥해진 것이 사실이다. 협화음의 음악 말고도 불협화음의 음악 역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요즘이다. 다를 뿐, 틀리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피타고라스적인 아이디어는 우리에게 짙게 남아있다. 비례적 판단이 곧 윤리적 판단이 된다는 아이디어 말이다. 차량 과속 단속기, 음주나 성매매가 가능한 법적 연령에 대한 기준, 선물과 뇌물의 사이, 보수와 진보의 싸움 등 모두 우리의 인식 속 어딘가에 있는 적절한 비(比), 수(數)에 대한 문제에 달려 있다. 물론 삼라만상을 비례와 수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의 판단은 우리가 아닌 수학의 몫인 것 같다는 인상을 쉬이 떨쳐낼 수도 없을 것 같다.


문명은 수학에 절대적으로 빚지고 있다. 그것은 수학이 자연과 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 너무나도 가까워서─어쩌면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학은 자연에게 있어 적대적인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자연은 자연일 뿐이고 수학 역시 수학일 뿐이다. 문명과 수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명과 수학이 동일시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은 오직 문명─인간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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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나의 글/짧은 글 2015. 3. 15. 16:17

지난 글을 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창피하다. 당시에 어느 스타일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물들어 있는지 확연히 보여서 촌스럽고 얄팍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지난 글을 읽는 즐거움이란, 글쓰기에 열심을 내었던 지난 내가 지금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 선물은 이러한 방식으로밖에는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지난 날에 많은 글을 쓰지 않았던 게 참 아쉽다. 이제는 나중의 나에게 이보다는 훨씬 더 많은 선물을 주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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