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의 영화 세계에는 언제나 그를 열광하게 했던 영화들에 대한 존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던 간에, 류승완 필름은 이 분야의 선각자들이 이루어놓은 것들에 대한 애정고백을 쉬지 않습니다. 베를린 역시 그렇습니다. 냉전 시대가 낳은 걸작 첩보물들로부터 본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가 쌓아온 것들을 갖고 한 바탕 해보자!라는 정신이 바로 이 영화의 원동력일 테니까요.
주제와 이야기는 그 뒤의 문제로 보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스토리가 부실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베를린을 완성시키는 것은 스타일입니다. 스토리는 20자 요약이 가능하고, 주인공인 표종성(하정우)은 북한 첩보원의 어떤 전형입니다. 스테레오 타입까지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미 의형제에서 강동원이 그러한 류의 캐릭터를 선보인 것을 보았잖습니까. 당연히 베를린이 더 수작이고, 캐릭터도 좋습니다. 그럼에도 베를린은 여전히 스타일이 중요합니다. 몸담은 조직에게 배신당한데다가 적들도 만만치 않은 첩보원의 숨막히는 생존이 있고, 푯푯 거리는 격투가 있으며, 가슴에 한 발, 머리에 한 발씩 명중시키는 프로페셔널한 총격술이 있습니다. 류승완 감독과 정두홍 무술감독의 서울액션스쿨팀은 대단한 물건을 뽑아냈어요.
거기에 이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배우들도 완성도에 큰 보탬을 합니다. 하정우는 언제나처럼 성실하고, 한석규는 언제나처럼 노련하고, 류승범은 모처럼만에 괜찮은 작품을 만났죠. 이경영과 명계남 같은 배우들도 팬티를 적시기에 충분한 사람들이죠. 전지현은 그야말로 의외인데, 외모야 출중한 거 모두가 알아도 연기를 이렇게까지 잘 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처음으로 전지현에게 반한 영화예요.
다만 저는 북한이라는 주제를 갖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도 괜찮은 건가 싶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썩 즐겼음에도 그렇습니다. 물론 21세기 현재, 냉전의 논리로 첩보물을 만들 수 있고 극중에서 빨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은 한반도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이것들은 그렇게 오락적이지 않은 현실이 낳았습니다. 와 하정우 멋있네, 전지현 이쁘네, 스타일 죽이네 정도의 소감이 나오는 영화가 이런 현실 속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더군요.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질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영화의 소재란 것은 매우 좁아집니다. 또 저는 북한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살고 있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런 저에게 가타부타 논할 자격은 없겠죠. 그래도 영 켕기는 구석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진짜 재밌게 봤기 때문에 더 그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0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