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리뷰/영화 2015. 3. 15. 16:12

류승완의 영화 세계에는 언제나 그를 열광하게 했던 영화들에 대한 존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던 간에, 류승완 필름은 이 분야의 선각자들이 이루어놓은 것들에 대한 애정고백을 쉬지 않습니다. 베를린 역시 그렇습니다. 냉전 시대가 낳은 걸작 첩보물들로부터 본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가 쌓아온 것들을 갖고 한 바탕 해보자!라는 정신이 바로 이 영화의 원동력일 테니까요.

 

주제와 이야기는 그 뒤의 문제로 보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스토리가 부실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국 베를린을 완성시키는 것은 스타일입니다. 스토리는 20자 요약이 가능하고, 주인공인 표종성(하정우)은 북한 첩보원의 어떤 전형입니다. 스테레오 타입까지는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미 의형제에서 강동원이 그러한 류의 캐릭터를 선보인 것을 보았잖습니까. 당연히 베를린이 더 수작이고, 캐릭터도 좋습니다. 그럼에도 베를린은 여전히 스타일이 중요합니다. 몸담은 조직에게 배신당한데다가 적들도 만만치 않은 첩보원의 숨막히는 생존이 있고, 푯푯 거리는 격투가 있으며, 가슴에 한 발, 머리에 한 발씩 명중시키는 프로페셔널한 총격술이 있습니다. 류승완 감독과 정두홍 무술감독의 서울액션스쿨팀은 대단한 물건을 뽑아냈어요.

 

거기에 이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배우들도 완성도에 큰 보탬을 합니다. 하정우는 언제나처럼 성실하고, 한석규는 언제나처럼 노련하고, 류승범은 모처럼만에 괜찮은 작품을 만났죠. 이경영과 명계남 같은 배우들도 팬티를 적시기에 충분한 사람들이죠. 전지현은 그야말로 의외인데, 외모야 출중한 거 모두가 알아도 연기를 이렇게까지 잘 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처음으로 전지현에게 반한 영화예요.

 

다만 저는 북한이라는 주제를 갖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도 괜찮은 건가 싶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썩 즐겼음에도 그렇습니다. 물론 21세기 현재, 냉전의 논리로 첩보물을 만들 수 있고 극중에서 빨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은 한반도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이것들은 그렇게 오락적이지 않은 현실이 낳았습니다. 와 하정우 멋있네, 전지현 이쁘네, 스타일 죽이네 정도의 소감이 나오는 영화가 이런 현실 속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더군요.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질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영화의 소재란 것은 매우 좁아집니다. 또 저는 북한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살고 있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런 저에게 가타부타 논할 자격은 없겠죠. 그래도 영 켕기는 구석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진짜 재밌게 봤기 때문에 더 그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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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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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리뷰/영화 2015. 3. 15. 16:10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꾼이 중요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500일의 썸머 역시 그렇지요. 모든 가지를 쳐내고 이야기의 형식만 남긴다면 모든 로멘틱 코미디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만났고 잘 됐다/헤어졌다'밖에 없을 겁니다. 거기에 왜 그랬니, 그건 우리에게 납득이 되니 하는 살을 붙이는 게 이야기꾼의 몫이겠죠.


남자, 톰(조셉 고든-레빗)은 여자, 썸머(쥬이 드샤넬)가 자신의 운명적 대상이어야 합니다. 반면 썸머에게는 톰이 운명적 대상일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둘의 불평등은 시작됩니다. 하긴, 세상에 평등한 연인이 어디 있겠어요. 남녀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아까운 사람'이 되는 걸요. 당신은 당신의 애인과 평등하고 동등한 관계입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딱 그만큼 그 사람도 당신을 사랑하나요? 아, 애인이 없다구요... 죄송. 하여간,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더 절절하게 사랑하고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덜 절절하게 사랑하는 것이 연인 관계, 사람 관계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썸머는 톰과 헤어진 후에 얼마 안 있어 새 남자가 생기죠. 톰이 상찌질을 부리고 있을 그때에, 썅년! 하지만 이 영화는 톰의 영화라서, 썸머의 생각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당신과 나의 관계가 불평등한 이유 두 번째는, 나는 내 입장에서밖에 당신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겠지요.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상대방 입장에서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을 겁니다. 딱 내가 생각하는 만큼 상대를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방의 좋은 점이 보입니다. 나와 헤어지고 얼마 안 있어 새 애인을 만든 그 썅년이 나와 사귈 때에 얼마나 지긋지긋했을지 우리가 알 길이 있나요?


결국 이 영화는 사랑의 이유가 '~하기 때문에'인 because가 아닌 '~에도 불구하고'인 nevertheless로 수식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없다면 참 다행이겠습니다만.


1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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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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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퀸

리뷰/영화 2015. 3. 15. 16:09

지상파 채널에서 틀어주는 설/추석 특선영화를 싫어합니다. 아니, 한국영화만 싫어합니다. 외화는 제가 좋아하는 성우들의 더빙을 보는 재미가 있는 반면, 한국영화는 시나리오 질감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비속어를 다 지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명절 특선 영화로 틀어주는 친구를 보았을 때의 충격이란... 깡패 영화에서 비속어와 폭력, 섹스를 지우면 뭘 보란 건지 모르겠습니다. 유오성이 징그러운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던 게 생각나요.

 

다짜고짜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면, 어제 밤에 설 특선 영화로 댄싱 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심의에 통과되지 못한 대사와 장면은 잘려나갔지만, 이 영화에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서울시장 후보 경선과 아이돌 가수 도전기로 나누어 진행되는데, 이중 더 중요한 파트라면 그것은 단연 시장 선거 파트입니다. 총선과 대선을 치렀던 2012년 설에 나온 이 영화는 따라서 정치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영화인데, 그 수단이 좀 애석합니다. 강북에 전세 사는 착한 인권변호사와 번동이 어딨는지도 모르는 강남 로얄 정치인들을 들이대면서 시민윤리를 가르치는데, 아... 인권변호사, 급식 문제, 라이징 스타... 만약 이 영화가 저번 시장 선거 때 나왔더라면 프로파간다라는 오명을 써도 할 말이 없었겠어요. 게다가 황정민이 시장 후보로 받은 배번은 2번!(^^)

 

그럼에도! 황정민과 엄정화의 궁합은 매우 좋습니다. 저는 가수 엄정화보다, 배우 엄정화가 더 탁월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의 연기를 꽤 즐긴 편입니다. 또 이효리와 길이 슈스케 심사위원 자격으로 엄정화(극중 배역 이름이기도 합니다.)를 평가하는 장면은 엄정화를 알고 있는 우리에겐 또다른 재미죠. 무엇보다 저는 이 영화를 티비로 봤습니다. 극장에서 봤더라면 더 툴툴거렸을 텐데, 8000원이 사람의 인심을 참 넉넉하게 해주네요.


1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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