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수학을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해서 학교를 떠나는 순간 더 이상 수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수학이란 셈이고 기술이다. 무엇보다 입시라는 문의 너비를 결정하는 도구라는 인식이 사회에 만연하다. 수학은 문과와 이과의 선택을 도와주는 가늠자이기도 하며, 과외 시장에서 언제나 1위를 다투는 인기 종목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로 수학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민음인에서 2014년에 출판한 <문명과 수학>은 EBS의 <다큐 프라임>이 2011년에 방송한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이 다큐멘터리는 수학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 조금은 다른 입장에서 살펴본다. 지금껏 우리가 너무 기능적인 측면에서 수학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놓쳤던 부분을 조명하려는 이 기획은, 세계의 원리에 대한 청사진으로서의 수학을 소개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사교육의 대항마이자 지금도 수많은 입시생들에게 기능으로서의 수학을 소개하는 EBS에서 만들어낸 다큐멘터리이기에 더 흥미로운 면이 있다.
문명의 발달사는 곧 수학의 발달사임을 밝히는 이 책은, 문명이 제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식으로 수학의 발전을 요구해왔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이 기획은 고대 이집트의 초보적인 도량법, 저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음률(音律)의 발견, 미적분의 탄생과 우주의 모형을 궁구하는 첨단의 수학에까지 문명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수학을 알게 해준다. 문명은 대개 자연의 반대어로서 사용된다. 수학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자연의 원리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수학이 역설적으로 자연에 반대되는 문명을 팽창시켜왔다. 이런 아이디어에까지 이르게 되면, 왜 수학이 철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학문인지 납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두 학문은 모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열심히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이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그 어느 학문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피타고라스의 음률의 발견과 관련하여 생각할 것이 있다. 음률이란 바른 음에 대한 탐구이고, 바른 음이란 옳지 못한 음의 존재를 암시한다. 자기의 이름을 딴 정리로 만세에 이름을 떨친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이 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만물은 모두 어떤 비례의 관계에 놓여져 있다고 생각했다. 바른 음과 옳지 못한 음을 규정한 음률이 대표적이다. 실로 이 세상에는 음악이나 직각삼각형의 세 변을 비롯해서 수많은 비율들이 존재한다. 그 비율들은 칼 같아서, 진정 이 세상은 수로 이루어져 있음을 실감하게 하기도 한다. 계량이 가능한 영역 밖에 있는 것들조차도 수학적인 감성을 건드리는데, 이른바 연인들의 밀당이라는 것 역시 밀고 당김의 황금률을 구하는 것 아니겠는가. 중용의 미덕 역시 산술적이든 비산술적이든 모두 넘침과 모자람 사이에 있는 어떤 알맞은 비율을 논하고 있다. 정말 세상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횡행하는 요즘에야 황금률이라든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보편적인 무언가에 대해서는 이전에 비해 다소 시큰둥해진 것이 사실이다. 협화음의 음악 말고도 불협화음의 음악 역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요즘이다. 다를 뿐, 틀리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피타고라스적인 아이디어는 우리에게 짙게 남아있다. 비례적 판단이 곧 윤리적 판단이 된다는 아이디어 말이다. 차량 과속 단속기, 음주나 성매매가 가능한 법적 연령에 대한 기준, 선물과 뇌물의 사이, 보수와 진보의 싸움 등 모두 우리의 인식 속 어딘가에 있는 적절한 비(比), 수(數)에 대한 문제에 달려 있다. 물론 삼라만상을 비례와 수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의 판단은 우리가 아닌 수학의 몫인 것 같다는 인상을 쉬이 떨쳐낼 수도 없을 것 같다.
문명은 수학에 절대적으로 빚지고 있다. 그것은 수학이 자연과 친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 너무나도 가까워서─어쩌면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학은 자연에게 있어 적대적인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자연은 자연일 뿐이고 수학 역시 수학일 뿐이다. 문명과 수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명과 수학이 동일시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은 오직 문명─인간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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