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부천시장기 시민독서경진대회>라는 것이 있길래 독후감을 응모했다(내가 근무하는 부대는 부천시와 인접해 있다.). 결과는 장려상(부상은 은수저 세트). 마이너한 대회의 마이너한 상이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아주 제한적인 사람들에게만 글을 노출시켰을 때보다는 조금 더 폭넓은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 좋게 받았다. 물론 최고상이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은 어찌 됐든 간에 이것은 나의 첫 발일 뿐이다. 앞으로 더 많은 공모전과 기회를 통해 의미 있는 걸음들을 해나가면 되겠지. 아래에 제출했던 독후감의 전문을 싣는다.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을 갖고 썼다.



<검은 꽃>을 읽고.


이민의 역사는 대체로 서글프다. 정주문화를 가진 민족의 그것은 특히 더 그렇다. 오랜 세월 농경문화와 유교문화 안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이민은 전체 역사에서 극히 후반에, 극히 짧은 기간에 몰려 있다. 농경지와 조상이 있는 고향땅을 등지고 이민을 간다는 것은 그만큼 기구한 사연이 있지 않고서는 한민족에게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은 1905년, 저마다의 사연으로 조선 최초의 이민 길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적도는커녕 태평양의 존재조차 생소했던 그 시절에 1033명의 조선인들이 영국의 화물선 일포드 호를 타고 멕시코에 가게 된다. 본디 여객선이 아닌 화물선인지라,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가는 조선인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사십여 일의 고통스러운 항해 끝에 멕시코에 다다른 조선인들은, 그러나, 항해와는 비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농노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민브로커와 대륙식민회사에게 속아 4년 동안의 노예계약에 휘말린 조선인들은 조선에서보다 더 피폐한 삶을 살지만, 그들은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는다. 물론 고생을 모르고 살아왔던 양반들과 몇몇 이들은 낙오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이겨내 간다. 하지만 때는 멕시코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멕시코 혁명기. 인간다운 삶을 희구하는 이들 앞에 끝없는 시련이 이어진다.

 

1905년은 러일전쟁이 있었던 해다. 제정 러시아의 발틱함대와 일제의 함대가 동해에서 싸워 일본군이 승리하자, 러시아의 힘은 더욱 축소된다. 러시아에 편승하여 일본을 견제하고 싶었던 고종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가고, 대한의 황제는 크게 낙심한다. 이를 두고 화자는 짧게 코멘트 한다. “역사엔 요행이 없었다.”

 

이야말로 <검은 꽃>을 관통하는 문장일 것이다. 열강의 수탈, 한일합병, 멕시코 혁명을 두루 거치며 질곡을 겪는 등장인물들은 역사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로부터 단 한 발짝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지주계급이 평한 것처럼 그들이 게으르고 무능해서가 아니다. 더러 그러한 자가 있었을 진 몰라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조선인들은 게으르고 무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가난과 비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농노생활이 끝나고서도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은 어려웠다. 과테말라의 혁명군을 도와 한 몫 챙기려던 일단의 무리들은 다수가 과테말라 정글에서 목숨을 잃었고, 멕시코에 남아 활로를 모색하는 이들도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삶을 살다가 끝을 맞았다. 지주계급도 마찬가지여서, 비중 있게 다뤄진 두 지주는 모두 소망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몰락하며, 조선인 중 유일하게 영어와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알아 통역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권용준도 아편중독 후에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그들은 대체로 부지런히 살았고 어느 정도의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마른 낙엽처럼 바스라지고 말았다. 고종 황제 역시 망국의 위기 앞에 할 수 있는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화자의 표현대로 대한제국은 “물에 떨어진 잉크방울처럼” 사라져 버렸다. 역사에 요행은 없다. 열심히 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가라앉는 타이타닉 호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가장 약한 나라의 가장 약한 백성으로 운명 지워진 이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것, 신세를 피는 것은 요행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검은 꽃>에서 무엇을 읽는가. 허무주의인가. 그렇다, 이 소설에서 어느 정도의 허무주의를 읽지 않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얻는 행/불행이 결국 역사적 상황에 의한 것밖에 안 된다면 예정론적 체념에 빠지기 십상 아니겠는가. 하지만 소설가의 우울한 비전이 반드시 독자에게도 우울감만 안기는 것은 아니다. 장례식장이나 병원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온갖 고통은, 인생이란 마치 짧은 행복 사이에 있는 긴 질곡들로 채워진 것이라 생각 들게 하지만 동시에 불행의 반대급부로서의 행복을 생각하게도 한다. 불행은 행복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진실을 알려준다. 거역할 수 없는 불행과 시련 속에서도, 끝내 놓치지 말아야 할 무언가는 빛나는 법이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처한 처지를 역전시키느냐 마느냐보다, 갖은 시련 속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가치를 붙잡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하기도 하다. 이 소설에는 그 가치마저 붕괴시키려는 기획은 없는 것 같다. 불가항력적인 처절함 속에서도 꽃피운 인간만의 숭고함을 우리가 읽어내고,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변화의 씨앗이 우리 안에 심겨지는 것. 문학을 읽는 수많은 이유 중에 이것이 있음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검은 꽃>이라는 제목에 대해 생각해본다. 꽃은 유성생식을 하는 식물의 생식기 역할을 한다. 즉, 이 꽃은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인 것이다. 역사라는 그늘에 가려 거멓게 핀 꽃일지언정, 그 꽃은 도도히 흐르는 역사처럼 도도히 피었다 지며 또 다른 꽃을 낳는다. 그것은 자신을 무화(無化)시키려는 역사에 대한 검은 꽃의 유일한 대항일 것이다.

'리뷰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을 아는 지식, 제임스 패커  (0) 2015.12.22
죄와 벌,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0) 2015.12.21
에밀, 장 자크 루소  (0) 2015.12.11
'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 마라  (0) 2015.04.04
문명과 수학  (0) 2015.03.28
Posted by MarlonPai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