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여름, 서해에 빠뜨리고 만 나의 동그란 안경(일명 존 레넌 안경)은 꽤 특징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의 시선을 끌곤 했다. 개화기 지식인들이 꼈을 법한 디자인 덕에, 나의 전공인 철학과 그 안경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야, 안경 특이하네. 전공이 뭐세요? 철학과? 역시... 그래서 그런 안경 끼는 거예요?
아니. 그래서 그런 안경을 꼈던 것은 아니다. 난 그저 존 레넌처럼 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경영학을, 실용음악을, 공학을, 연극영화학을 전공했다 한들 나는 그 안경을 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철학을 공부했고,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물한 살 이후로 그 안경에 대한 질문과 함께 나는 이 질문도 정말 숱하게 들어야만 했다; 삶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혹은 이 상황(또는 물건)을 철학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아, 정말이지 이런 질문들은 난처하다. 나는 철학도哲學徒, 그것도 학부 공부 3, 4년 한 게 고작인 사람일 뿐이다. 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한갓 철학을 공부한 사람에 지나지 않아서 언제나 인생의 오의奧義를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삶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버겁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내가 공수교육을 받을 때의 일인데, 지상교육이 끝나고 모형탑에서 교육을 받을 때였다. 11미터의 모형탑에서 이탈을 하는 것은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기 때문에 교육생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교관들이 말을 걸어주기도 한다. 나 역시 뛸 생각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는데, 한 교관이 말을 걸었다.
-자네는 안경이 참 특이하구만 그래. 밖에서 뭘 하다 왔나. 뭐? 철학? 그래. 그럼 자네가 모형탑에서 뛰어내린 다음에 다시 여기로 올라올 때까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30초 동안 말할 수 있게 준비해 오도록.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고 교육 받는 것도 벅찬데 삶에 대한 정의라... 그 정신 없는 와중에도 나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다. 마침 그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칸트의 윤리학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갖고서 준비를 했다. 마침내 모형탑에 올라가 그 교관 앞에 다시 서게 된 나. 행복의 추구와 인간성의 관계에서부터 칸트의 유명한 '네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원리로 타당한가 살펴보라'까지 설파하기에 이른다. 나는 또 어김없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했다.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한테는 일본어로 말해봐, 미대생한테는 그림 그려봐, 노래를 전공한 사람한테는 노래해봐, 이러는 사람은 어딜 가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하기 때문에 전공 삼는 것이 아니라 잘 하기 위하여 전공 삼는 것이다. 물론 해당하는 전공을 갖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소양은 있어야 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크박스처럼 버튼을 누르면 바로 좔좔좔 쏟아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는 게 어디 쉽게 얻어지는 것인가. 비非전공자인 여러분 보다야는 잘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철학도에게 철학에서 말하는 삶이 무엇인지 한 번쯤은 듣고 싶어하는 그네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또 어쩌면 철학을 전공하는 모든 이에게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삶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세상에 공급해야 하는 업業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철학의 쓸모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기왕이면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남을 수록 보장되는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