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 기독교 용어로는 사역이라 칭하는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성령이라 답할 것이며, 이는 옳다. 그런데 성령이 중요하다, 할 때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 또 왜 중요한지 밝히는 일에는 의견이 쉽게 모이지 않을 수 있다. 저마다 성령에 대한 모호하고 편협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단서는 성경 곳곳에 있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추론하기에 부족함은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님에 비해 성령에 대한 가르침은 적은 것 같다. 우리가 줄곧 배우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도 오해와 편견이 쌓이기 십상인데, 그보다 덜 배우는 성령에 대해서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개념어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성의 적절한 도움을 입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도출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견실한 기독교단은 삼위일체를 믿으며, 가르친다. 바로 이 삼위의 하나님 중 성령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나머지 두 하나님에 비해 심히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Keep in step with the Spirit>라는 책을 썼고 이는 우리말로 <성령을 아는 지식>이라는 제목과 함께 번역되었다. 이는 저자의 명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과 대응시킴으로써 독자에게 보다 친숙함을 주려는 기획의 산물로 보인다. 이 책은 번역본의 제목대로, 성령에 대한 지식 전달을 목표로 한다. 역사적 이해, 종파적 이해, 그 역할에 대한 이해를 두루 제공하기에 성령론에 대한 입문서로 탁월하다.
이 책의 또다른 중요한 테마가 있다. 그것은 이 책이 쓰여진 1980년대와 관련이 있는데, 1980년대는 은사주의, 또는 회복주의라 일컬어지는 운동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지 20여년이 넘었을 즈음이었다. 이 운동은 역동적인 에너지를 갖고서 침체된 기성 기독교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예배와 삶에서 온통 경직돼 있는 신자와 공동체의 모습을 '성령에 힘입어' 바꾸어 나갔다. 그 역사役事에 많은 기독교인은 고무되었으며, 그 영향은 현재까지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운동은 반反지성주의적이고 독단적인 풍조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제임스 패커는 이 현상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예의 운동의 덕이 되는 부분과 아쉬운 부분을 두루 진단한다.
'~주의', '~운동'이라는 명칭 때문에 이 연구가 특정 기독교 분파에 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선 이 움직임은 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20세기 초의 오순절운동과 흡사한 점이 많다), 다른 기독교 사조와 두부 자르듯이 나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어떤 개개의 운동이라도 결국엔 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뤄지는 일이잖는가. 무엇보다 예의 운동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양상은 많건 적건 지금의 교회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즉 누군가에겐(그 숫자가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그와 그의 공동체의 이야기인 것이다.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깔뱅의 이야기를 해준다. 평소 말씀을 전할 때 비유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깔뱅이 말하기를, 성경말씀은 마치 돋보기 같아서 우리가 느낄 수 있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진리를 보다 뚜렷하게 해준다 하였다. 성경은 우리의 돋보기이다. 물론 우리가 삼위일체를 교리적으로는 모르더라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려고 하면 어렴풋이는 삼위의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교한 신학과 교리를 학습하는 것이 건강하고 사랑 넘치는 교회 공동체를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미쁘셔서,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우시고 먹이신다. 하지만 성경으로 엄격히 비추지 않은 설익은 관념들은 언제든지 우리를 실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의 도의적인 무지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경을 진리의 가늠자로 세우려는 저자의 치열함은, 우리를 허다한 오류로부터 멀리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다만 저자도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억측을 저지하기 위해 본인도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인간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홍종락 옮김, 홍성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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