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이야기, 두 번째



나는 육군 운전병이다. 따라서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서 바로 자대에 배치받는 것이 아니라, 수송교육단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은 후에야 자대로 갈 수 있었다. 나는 소형차 운전병이기 때문에 2주 간의 교육만 받으면 됐다. 이 이야기는 그 2주 동안 수송교육단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다.


수송교육단은 차종을 소형/중형/대형 세 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는데, 첫 3일 동안은 그저 몸이 밀려들어가는 대로 생활관을 쓰지만, 일단 이 3일 동안 진행되는 전산분류, 기량점검을 통한 분류를 거치고나면 차종별로 생활관을 쓰게 된다. 이때 소형반의 경우에는 생활관에 나이순으로 나뉘어 들어가므로, 스물다섯에 입대한 나는 맨 앞 생활관에 들어갔다. 내 바로 옆 자리를 썼던 동갑내기 Y는 입대 전 초등학교 교사 일을 하다 왔다. 선굵은 외모와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직업이었다. 그리고 Y는 내가 여지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재밌는 사람 중 하나였다.


Y의 대학시절, 그에게 있어 여자후배는 단 두 부류만 존재했다. 밥과 술. 신입생 OT와 같은 자리에서 신입생과 재학생이 처음 대면할 때, 그 왁자한 분위기를 힘입어 밥약속을 우루루 잡는 것은 우리네 대학문화다. Y 역시 새내기들에게 밥을 사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바, 약속을 잡는다. 근데 여기서 알고리즘이 적용되는데, 이쁜 여후배에게는 술약속, 그저 그런 여후배(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죄송하게 생각한다.)에게는 밥약속을 잡는 것이다. '술 먹자'는 곧 '이쁘다'가 되고, '밥 먹자'는 생각하시는 대로다. 남자 후배에게는? 그에게 있어 남자는 있어도 남자 후배 같은 건 없다나. 하여간 이러한 프로세스가 매년 반복되다 보니, 그 한결 같음에 Y의 친구와 선후배들은 이를 속물적이라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어떤 도전의식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여후배가 Y에게 어떤 약속을 받느냐 지켜보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XX학번 ○○○입니다.

-그래, 술 먹자. 반가워.

-안녕하세요, 선배님. XX학번 △△△입니다.

-그래그래, 밥 먹자.


어떤 후배는 이렇게 물어보기도 한다.


-선배님, 저는 술이예요, 밥이예요?

-넌 당연히 밥이지!



하루는 책을 읽고 있던 나에게 Y가 말하길, 본인이 평생을 살며 완독한 책이 딱 두 권 있는데 한 권은 <어린 왕자>이고 한 권은 애견 사육 가이드였다고 한다. <어린 왕자>는 초등학생 때인가 읽었으며, 애견 서적은 비교적 최근에 읽었는데, 그가 갈색푸들을 입양하고서였다. 그 강아지를 잘 키우고 싶었던 마음에 읽었다는데, 이제껏 그렇게 진지하고 재밌게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고. 평생의 독서량이 단 두권인데도─과장일 가능성이 다분하지만─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다소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서울, 경기, 인천 지역의 유흥가와 윤락업소는 줄줄이 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단일 어휘 중에 활용빈도가 가장 높은 어휘는 "쓰벌"이었다. 사실 "쓰벌"의 원형이 되는 그 욕은, 한국인의 희노애락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입체적이고 풍부한 함의를 지닌 전천후 어휘이긴 하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울 때에, 나의 감정이 어떠하건 간에 그 욕은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 진리를 Y는 간파했던 걸까. 그에게 "쓰벌"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라기 보다는 감탄사 내지는 날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살면서 그 단어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이 들었던 적이 없다.


수료식을 3일 남겨둔 날, 다시 말하면 자대배치까지 3일 남은 그날에, 별안간 Y의 머리가 3mm로 밀어져 있었다. 그날 Y가 동기생 한 명에게 이발을 부탁했는데, 모히칸 스타일을 만든다는 게 그만 민머리에 김을 얹은 듯한 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마 좌우대칭을 맞추려 조금씩 옆머리를 파내다가 그만 참사가 벌어진 듯 싶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머리를 견딜 수 없었던 Y는 아예 온 머리를 3mm로 밀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대배치 3일 전에.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시켜드리자면, 군대는 병사들에게 대머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병이 아니고서야 기간병에게는 옆 뒷 머리가 정돈된 스포츠 머리를 권장하며, 훈련병에게조차 3mm는 눈총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이다. 중고등학교에서도 그러하듯이 과도하게 짧은 머리는 오히려 반항의 이미지를 준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무던히 묻혀가는 것이 상책인 군대에서 튄다는 것은 이익보다는 불이익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된다. 안 그래도 선이 굵은 외모의 Y가 삭발을 하니 흡사 달마대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수료를 얼마 안 남긴 날에도 Y는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예의 "쓰벌"이 더욱 자주 들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야한 생각으로 발모를 하겠답시고 온갖 선정적인 말들을 입에 물었는데, 삼 일 동안 "섹스"라는 단어만 백 번은 족히 들었던 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퍼런 구슬이 시커매질 리는 없었다. 그 용모는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 적응이 안 되어서 각각 자대로 이동하기까지 우리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여자후배를 밥과 술로 나누는 과감한 이분법, 일생의 독서량은 단 두 권, 그러면서도 술집과 성매매업소에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쓰벌"애용가, 헤비스모커에 주당인 Y는 교대생─초등학교 교사가 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모조리 뒤엎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 동기생이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는 놈이 무슨 선생이냐'고 하자, '애들만 안 건드리면 된다'고 응수했던 Y는, 어쩌면 놀기 좋아하는 모습 이면에 투철한 직업정신을 소유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보름도 안 되는 시간만으로는 누군가를 완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유쾌한 모습 외에도 낙심한 동기생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거나, 아는 것 이상으로는 아는 체 하지 않으려는 겸손함이나 노래를 굉장히 맛깔나게 잘 부르는 면모들은 Y라는 사람의 입체성을 증명해주었다. 이것은 나에게 인물 창작에 있어 더없이 좋은 교범이 될 듯 하다.


자대배치 받기 전의 교육생일 때에는 장군차 운전병이 편하리라는 썰에 혹하기 십상이다. 특히 우리 같은 소형반은 장군차 운전병, 이른바 '스타레이서'에 대한 야무진 기대를 한 번쯤은 하게 되는데, Y는 혹여나 장군의 부인께서 젊은 자신을 유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더 야무진 기대(?)를 했었다. 혼자서 3류 에로영화의 스토리를 읊어대다가 본인이 한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진심으로 갈등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여준 Y가 자대배치 이후에 진짜로 스타레이서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 특유의 익살로 잘 지내고 있기야 하겠지만.


Y와는 연락처를 주고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 연락할 일도, 만날 일도 없겠지만 혹여나 훗날 나의 자식이 다니게 될 학교의 선생으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 때에는 인간으로서의 교사에 대한 진실을 한 꺼풀 벗겨준 그에게 보답의 저녁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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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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