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rt & Rights'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6.05.28 [Court & Rights] 여는 말, 그리고 <에린 브로코비치> 2

인사동 칼럼 – Court & Rights

1. 여는 말, 그리고 <에린 브로코비치>

 

여는 말

 

인류 전체 역사에서 인권이라는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최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에서도,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장받을 권리와 그에 따른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지식과 양심이 있는 곳이라면 사람다움에 대한 개념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인의 평등과 자유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는 최고의 법전이 만들어지고나서도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야만 했다. 작금의 시대엔 사람의 정의가 종적種的 특성에 따르지만, 한때는 성별, 피부색, 계급, 직업, 신념, 종교 따위에 따라 사람 대접을 받거나 받지 못하기도 했다.

앞에서도 법전을 잠깐 언급했지만, 인권과 법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권이 도덕적인 장려만으로도 지켜진다면 애초에 법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현실에서의 인권은 법의 보호와 강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또한 해당 사회에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꼴 짓는 데에도 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개인에게 어렴풋이 주어진 양심과 도덕감정만으로는 세세한 부분의 인권까지 챙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성문화된 사회적 합의––법이 그 모호함을 해소하는 데에 보탬이 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법은 만능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집행하는 법에는 모순도 많고 구멍도 많으며, 특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의 법 집행은 인권의 수호가 아닌 압살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때보다는 문명화가 진행되었다는 지금에도 법은 인권 문제의 완전한 대책이 될 수 없는 것 같다. 시민들의 준법 의식은 여전히 갈 길이 멀고, 법 자체의 한계로 인하여 결국에는 보다 포괄적이고 자발적인 도덕 또는 다른 무언가에 의지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Court & Rights>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인 이 칼럼은 법이 인권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갖는 역할과 한계를 다룰 예정이다. ‘Court’라는 단어를 쓰는 만큼 법정, 재판 과정, 법조인 등을 그린 법정 영화들 위주로 소개할 것이다. 다만 심도 있는 법 관련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내러티브가 있고 접근성이 높은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법정 영화의 재미 중 하나는 관객을 배심원으로 초청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권이 무엇이며,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권에는 무엇무엇이 있다고 기계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과 이야기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체험해 가는 것은 영화와 같은 서사예술의 미덕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힘센 사람들의 것인 마냥 보인다. 희망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낯뜨거운 일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법정 영화는 만들어진다. 법이 사람의 권리를 항상 담보해 주지는 못해도, 힘없는 사람의 권리가 법으로 보호 받는 순간은 종종 있다. 물론 그 순간은 흔치 않으며, 그래서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겠지만, 그 흔치 않게나마 보이는 순간 덕분에 희망이 아예 사그라지지 않는 것일 테다. 희망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고, 가능성은 힘의 다른 이름이다. 법정 영화를 함께 이야기하는 이 일이, 인권을 세워 나가는 데에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이 기획의 목적은 모두 달성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린 브로코비치>: 기업의 자유와 시민의 생존권에 관하여

 

자유라는 말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지난 역사는 얼마나 많은 피로 얼룩졌던가. 전쟁을 제외하면, 자유를 위한 투쟁만큼 시민의 피를 부른 사건은 찾기 힘들 것이다. 식민지배와 독재는 여전히 가까운 과거고, 그만큼 자유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사람답게 사는 조건의 전부는 아니다. 자유의 과포화 속에서는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생득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사람의 능력 간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에서 무제한의 자유와 경쟁이 허락될 경우 인간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를 바 없어진다. 물론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있는 한, 인간 사회가 여타 동물들의 그것과는 얼마간의 구별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일찍이 바이마르 헌법에서는, ‘경제생활의 질서가 모든 자에게 가치 있는 생활을 보장하는 정의의 원칙을 가져야 한다고 명시한 바 있다. 우리는 이것을생존권이라고 부르며, 자유권 및 평등권과 함께 인권의 가장 중요한 권리 중 하나로 꼽는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2000년작 <에린 브로코비치>는 거대 에너지기업 PG&E 힝클리 지사의 중크롬 유출로 인해 발생한 법적 분쟁 실화를 다룬 영화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에린 브로코비치는 두 번의 이혼을 겪었고, 보험도 없으며, 일만칠천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는 싱글맘이다. 어떤 해프닝을 거쳐 법률 회사의 사무직으로 취직한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PG&E의 수상한 동향을 감지한다. 알고 보니 이 회사는 설비의 부식 방지를 위해 인체에 극도로 유해한 중크롬을 사용한 후 폐기물 처리를 엉망으로 한 것. 그 결과 인근 지역 힝클리의 주민들은 오염된 상수원에서 물을 쓰게 되었고 수백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회사는 교묘한 법적 면책 수단을 동원해 이 일을 덮어두려 하고 있었다. 법대 출신도 아니고 법 지식도 거의 없었지만 에린 브로코비치는 집요한 탐문과 증거 확보를 통해 PG&E의 법적인 책임을 증명해 낸다. 이 사건의 책임으로 PG&E가 배상한 총액은 삼억삼천삼백만 달러로, 단일 재판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이다.

           녹록치 않은 삶을 살면서도 약자들의 권리를 찾아주려 분투하는 주인공의 개인적 활약도 그렇지만, 약자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법의 정신을 발견하는 것 역시 인상적이다. 대기업의 파렴치에 치를 떨면서도, 그들과 싸워 이기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다. 극중에서도 에린의 도전이 만류당하는 이유는, 그 일이 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긴 시간과 막대한 돈이 들 수도 있는 소송에서, 대기업을 이길 요량이 비법조인 싱글맘에게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상엔 명분만으로는 부족한 일들도 있는 것이라고, 그게 옳고 네가 열 받는 것도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배워간다. 간혹가다 힘센 사람이 혼날 때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흔한 일이며, 네게도 그런 운이 따라주겠느냐고, 체념을 요구받기도 한다.

           맞다. 힘센 사람들이 자주 혼나고 약한 사람들이 자주 이긴다면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영화가 만들어질 일이 있었겠는가. 뉴욕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들, 그것이 영화화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카고 컵스가 우승해주는 것 정도는 돼야 투자자들의 돈을 받아먹을 수 있다(시카고 컵스는 1908년 이후로 지금까지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 하고 있다). 그러니까 ‘PG&E와 힝클리 사건은 사실상 신화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구팀이 이기고 지는 것과는 달리, 인권의 법적 보호는 법과 정의가 제 구실을 하느냐 못 하느냐를 따지는 문제이다. 뉴욕 양키스가 타당한 절차를 거친다면야, 그 팀의 우승은 아무리 횟수가 많아도 그것이 부조리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와 약자의 권리를 짓밟는 대기업의 비윤리적 경영은 반칙이며, 바로 잡혀야 할 일이다. 법에게 시카고 컵스 팬들의 만족을 보호해줄 의무는 없지만, 힘센 사람들의 전횡으로부터 약자들을 보호해줄 의무는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확률의 세계에 살고 있다지만, 가능성이 높은 일만이 절대적으로 두둔되는 사회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한 요즘이다. ”안방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건[1]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학 참사 말이다. 힝클리 사건에 비하면 진행과정에서부터 다른 점이 많지만, 사건 발생의 양상에서 양자는 몇몇 닮은 구석이 있다. 유해검사 과정에서의 은폐, 사건과 본사와의 관련성 부인 등에서 그렇다. 이 사건의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결과만큼은 영화와 꼭 닮아서, 가해 회사에 대한 응당한 제재와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기를,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가 먼 나라, 지나간 과거의 신화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1] "가습기 살균제 피해, 안방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건", 노컷뉴스, 16.04.20. (http://www.nocutnews.co.kr/news/4581791)


Posted by MarlonPai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