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이야기, 첫 번째
그는 훈련 기간 중의 선탑자(운전보조자)였다. 사내답고 호방한 성격의 중대장. 언제나 그는 일인칭을 '엉아'라고 했다. 그를 조수석에 앉히고 운전을 하다보면, 그가 하는 통화의 내용들이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리게 된다. 대부분은 공적인 통화다. 훈련 기간이니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사적인 통화도 있는 듯, 퇴근 이후의 일정이라든가 오늘은 뭘 먹었는지 등 유난히 귀에 박히는 내용들도 있었다. 그럴 때에 그의 목소리는 퍽 부드러워서, 여자친구 내지는 배우자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그는 나에게 '짝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하루는 유락시설이 늘어져 있는 도로를 달리다가, 우리는 이런 곳이 바로 불륜의 온상이 아니겠느냐며 말을 주고 받았다. 길가 공터에 주차된 차를 보며 카섹스를 예견하는 등, 군인들다운─정확히 말하면 숫놈들다운 대화를 했다. 불륜, 가정, 부부…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다 보니 문득 이 사람은 연애를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난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자각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질문을 했다.
-중대장님, 사적인 질문 하나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어, 그래 물어봐
-혹시 여자친구 있으십니까?
-….
-죄송합니다.
'사적인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그의 손가락을 살피지 않았던 나의 부주의함에 대한 애석함과, 그에 대한 미안함으로 나의 말문은 막혀 있었다. 그런데,
-엉아가 작년 4월까지는 여자친구가 있었어.
-아... 그럼 아직 이별의 여파 때문에 애인을 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지 뭐. 한 2년 사귄 여자친구거든.
-예에...
-얼굴도 무척 이뻤어. ㅅ대학교 얼짱이었는데, 박신혜 닮았어. 내가 보기에도 이뻤던 것 같고. 몸매도 잘 빠지고. 그래서 데이트 하기 전에 (전)여자친구가 엉아를 기다리고 있잖아? 그럼 막 남자들이 와서 번호도 물어보고 그랬어.
-좋으셨겠습니다.
-좋았지. 결혼까지 생각했었는데. 엉아가 지금 아버지가 안 게셔. 울 아버지 돌아가실 때에도 (전)여자친구하고 같이 임종을 지켰으니까. 그때 나는 한 손으로 아버지 손 잡고, 한 손으로는 여자친구 손 잡고 그랬어. 우리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워낙에 성격이 이쁜 말을 못 하는 사람이어갖고 가시기 전에도 나하고 (전)여자친구한테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하셨어.
-그 정도로 가까우셨으면 정말 결혼하실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때야 그랬지.
-그럼 어쩌다 헤어지신 건지...
-어느 날엔가 데이트 하기 전에 점심을 먹으려고 순두부찌개 집엘 갔어. 근데 그날따라 (전)여자친구가 밥을 지저분하게 먹더라고. 공기밥 그릇에 찌개 덜어 먹는 거 알지? 막~ 그릇에 찌개 묻히고, 밥알도 여기저기 흘리고, 밥도 깨작 거리면서 먹고. 그게 보기 싫어서 밥을 왜 그렇게 먹냐고 했더니 갑자기 밥을 먹다 말더라? 그 길로 그냥 가게에서 나가길래, 쟤가 삐졌구나 하고 따라가서 잡았지. 미안하다고 계속 그러는데도 걔가 받아주질 않는 거야. '나는 언제나 너가 사과하면 받아줘야 하는 거냐'고 하더라고. 좀 열이 받데? 그래도 꾹 참고 (전)여자친구 손을 잡았어. 근데 손을 확 뿌리치는 거야. 내가 손 뿌리치는 걸 되게 싫어해. 걔는 그걸 알아. 알면서도 그런 거지. 그래서 나도 기분이 확 상해서 알았다고, 너 갈 길 가라고 했어. 뭐 그대로 데이트는 파토났지. 걔네 집까지 차로 태워다주는 동안 내가 그랬어.
"우리 진짜 안 맞는 거 같아. 오늘 모처럼 만나서 재밌게 놀려고 했는데 지금 밥 먹는 거 하나로도 이렇게 싸우잖아. 밥 하나 갖고도 이렇게 싸우는데 결혼하면 오죽하겠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성격이 이렇게 드세고 충돌이 잦은데 우리 너무 오래 사귄 것 같아."
이렇게 말하고 여자친구를 내려줬어. 원래 우리가 싸우면 항상 내가 먼저 연락했거든. 근데 이번엔 나도 연락을 안 했어. 그만큼 화났으니까. 근데 걔도 연락이 계속 없는 거야. 결국 내가 일주일 만에 먼저 연락했잖아. 그런데 여자친구가 그 사이에 마음의 정리를 마쳤나봐. 다시 연락을 했을 때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처음엔 삼 일까지 나의 연락을 기다렸대. 근데 삼 일이 넘어가니까 '우리가 헤어졌구나' 싶더라는 거야. 나중에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남자인 친구들은 안 그랬는데, 여자인 친구들은 내가 (전)여자친구를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한 말이 헤어지자는 말로 들릴 수 있었대. 내 뜻은 당연히, '우리가 이렇게 사소한 걸로 싸우니까 앞으로는 서로 좀 더 잘 해보자'였는데, 걔가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이렇게 사소한 걸로 싸우니까 진작에 헤어지자'였나봐. 그 뒤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사정사정 했는데도 끝까지 마음을 안 바꾸더라고. 집 앞까지 찾아가서 무릎도 꿇어보고 해도, 안돼. (전)여자친구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때 오빠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말할 정도였으면 다시 시작하실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결국엔 안 되더라고. 나중에야 드는 생각이, '그때 걔가 밥을 그렇게 먹었을 때, 먹기 싫어하는 것 같았을 때, 내가 그 밥을 대신 먹어줄걸.'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랬더라면 지금까지 사귀고 있을지도 몰랐는데.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그가 어른답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지만, 누구라도 실수가 실수인 줄 알았더라면, 그 말이 나에게 이별을 강요할 줄 알았더라면 누구도 실수하지 않고 누구도 이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말 때문에 이렇게 될 줄 몰랐었어.'라는 핑계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실수는 용서될 수 없고, 용서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이미 벌어졌을 따름이다.
-너도 보듯이 엉아가 성격이 세잖아. 또 게으른 걸 못 봐요. (전)여자친구랑 잘 맞는 부분도 많았어. 얼굴 박신혜지, 가슴 크지, 게다가 수학 선생님이라 항상 연필을 갖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거든. 근데 그거 있잖아, 여자들 펜 보관할 때 머리 긴 여자는 비녀처럼 머리에 꽂아서 하는 거. 여자친구가 그렇게 비녀 머리 하고 공부할 때에만 안경을 쓰는데, 딱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으면 뭔가 프로페셔널한 여성이 주는 매력도 있었다고. 속궁합도 아주 잘 맞아서 다 좋았는데 여자친구가 좀 게을렀어. 앞에 말했지만 엉아가 게으른 걸 못 보는데, 가끔 걔네 집에 가서 자고 일어나면 애가 깰 생각을 안 하더라고. 보통 손님이 오면 불편해서라도 일찍 깨잖아. 근데 뭐 볼 때마다 쳐 자. 내가 편해서 나한테만 그런 건가 했는데 걔네 어머니 말씀 들어보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더라고. 그걸 보면서 '내가 얘랑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싶긴 했었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헤어지진 않게 됐네.
그 뒤로도 그는 몇 번 정도 더 전 여자친구가 ㅅ대 얼짱이었다, 남자들한테서 번호 따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마 지금도 따이고 있을 거다 같은 얘기를 했고, 나도 그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제 갓 서른인데도 착실하게 돈을 모았고 유능한 이미지를 주는 그였지만, 장교로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진급의 벽 앞에서 결국 전역을 선택한다고 했다. 이제 반 년 정도 후에 그는 대위 전역을 하고 여행을 다니다가 공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한다고 했다. 직업군인에게 전역이란 새출발보다는 실직에 가까운 것이다. 실직을 반 년여 앞두고 있기에 그것 때문에라도 연애할 여유가 없다고 말한 그의 대답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하지만 그게 주된 이유일까 나는 생각했다. 나로서는 그의 생각을 알 만한 주제가 못 되었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모든 연인이 결혼을 하지는 않는다. 결혼을 바라지 않는 연인도, 결혼하지 않는 게 다행인 연인도 있다. 하지만 어느 연인도 헤어지길 원하며 연애를 시작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별을 지양하기 위해 제각기의 노력과 요령을 동원한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이별은 피치 못한 것이다. 위로받지 못할 슬픔을 견디고,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전 여자친구가 지저분하게 남긴 밥을 대신 먹어줬어야 했다는 그의 반성 때문에, 사랑과 엮인 이 모든 지랄을 긍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