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에세이 겸 문학이론서 <On writing>(국내명: <유혹하는 글쓰기>)를 보면 이 작가가 창작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예술은 마치 고고학자가 지층 속에 파묻힌 공룡의 화석을 탐사하듯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던 무언가를 발견해나가는 것일 뿐이라고. 이 이론(?)에 따르면, 스티븐 킹이 만들어냈다고 알려진 이야기들은 사실 우리에게 소개된 것이다. 이 태도는 예술에 대한 겸허함을 갖춘 동시에, 예술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여행하는 인간의 자그마한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음악에도 이 생각을 접목시키자면, 음악은 음악가들의 영감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능과 노력으로 발견될 따름일 것이다. 근데 이 발견은 누군가에게는 가능한 반면,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하거나 때로는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궁극의 음악─그런 것이 실제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이라는 것은 좀처럼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연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연주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위플래쉬>는 이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를 짊어지려 했던 용감한 인간의 이야기다. 오직 신들에게만 허락된 것 같은 살인적인 난이도의 재즈곡을 소화하려는 가련한 주인공, 앤드류 네이먼(마일즈 텔러 분)은 참혹함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간다. 앤드류가 드러밍에 있어 내리막을 걷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한계를 뛰어넘는 드러밍에 가까워질 수록 앤드류의 몸도 마음도 맛이 간다. 이야기의 얼개만 보자면 신화적이기도 하고 비극적이기도 하다. 신적인 영역에 도달하려 했다가 신세 망치는 이야기는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를 비롯해 우리에게 친숙한 테마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역시 예술보다는 맹목성인 것 같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탐닉하는 것이 음악이고 재즈여서 그나마 고상해 보이고, 그 집착의 결과물이 멋져 보이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음악이든 돈이든 간에 모든 가치를 깔아뭉개는 맹목성에는 어떤 위험함을 느끼게 된다. 맹목과 광기가 낳은 결과물은 보고 듣기에 아름다울지언정 그것으로 점철된 인생을 선뜻 동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작중에서 앤드류가 말하듯이, 밋밋하게 오래 살다가 잊혀지는 인생이느니 화끈하게 짧게 살다가 영원히 기억되는 인생을 선택하는 게 그에게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그러한 맹목성이 예술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다; 건전한 인생과 불멸의 성취 둘 다 얻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게 꼭 딜레마여야 하는 것인가? 글쎄, 그럴 수만 있다면야 역사상의 그 많았던 '황폐한 거인들'을 볼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