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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13 사랑
  2. 2017.05.31 정가네
  3. 2015.11.20 똥 이야기 2
  4. 2015.08.29 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의 업業
  5. 2015.05.31 똥 이야기
  6. 2015.04.20 돈 내고 즐기는 즐거움에 대하여
  7. 2015.04.18 손님 이야기_2
  8. 2015.03.29 나는 왜 읽고 쓰는가
  9. 2015.03.14 손님 이야기_1

사랑

나의 글/긴 글 2017. 6. 13. 08:50

01

이 주제는 우리 인생의 (거의)모든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이를 다루기가 꺼려진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기가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그 표현수단이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상관없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의 (거의)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주제, 사랑에 대해 무언가 말하는 일은 난감하다. 그 어떤 주제보다 사랑을 얘기할 때 구태의연해 지기 마련인데, 나까지 굳이 이 세상에 이미 차고 넘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보탤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내가 어떤 내용을 적더라도 그것은 상투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첫째로는 나의 짧은 식견과 비루한 글솜씨 때문이고, 둘째로는—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인데, 이보다 참신하기 어려운 주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에 대해 무언가 주절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 역시 나의 (거의)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만하면 이 수준 낮은 글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생은 결국 맹목에 수긍한다. 맹목이라는 말 그대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눈먼 사람의 여행과 같다. 그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사람은 그저 태어났기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왜 사냐는 질문에 우리는 멋쩍은 웃음을 짓거나 불쾌한 감정을 가진다. 그 질문은 다분히 비일상적인 것으로서,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뉘앙스를 지닐 때가 많다. 이 질문이 도발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다 할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근원과 목적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다급한 문제도 아닐 뿐더러,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것은 우리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질문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가장 작은 행성은 무엇인가, 같이 아무래도 좋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에게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이 안드로메다의 문제와 매한가지로 무용한 것밖에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삶의 의미에 비하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분명한 어조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당연한 소리! 사랑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문제는 우리가 사랑을 원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이다. 나는 사랑을 맹목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인생처럼 눈먼 사람의 까닭모를 여정과 닮아 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이유를 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가 잘생겨서 좋아', '나는 너가 재밌어서 좋아'라는 말은 일견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사랑이 조건에 근거함을 의미한다. 즉, 그 조건을 충족할 때에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물론 조건과 이유가 완전히 배제된 사랑이 존재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조건은 최소한일 수록, 막연할 수록 좋다. 달리 말하면, 맹목적일 수록 좋다.

만약 어떤 사랑에 조건이 줄줄이 달려 있다면 그 사랑은 어찌 보일까. 이를테면 '나는 너가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재밌고, 돈도 잘벌고, 키도 크고, 학벌도 좋고, 부모님도 좋은 분이셔서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이 있다고 하자. 반면에 '나는 너가 못생기고, 운동도 못하고, 재미없고, 돈도 못벌고, 키도 작고, 학벌도 안 좋고, 부모님도 개차반이지만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은 어떠한가. 두 사랑고백 중에서 어떤 것에 더 진정성이 실려 있는 것 같은가. 우리는 누구나 맹목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맹목적인 사랑을 줄 만한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어떤 시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조건적인 사랑을 사고 판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유용한 방법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받을 수도 없는 우리에게 이런 시장마저 없다면, 우리는 영영 사랑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 완벽주의에 집착하면 피곤해 지는 법. 한계는 뛰어넘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라고 존재하는 것이지 않는가(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배우며 자란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안엔 달래지지 않는 욕망이 있다. 우리는 조건적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한다. 이 서글픈 이기심은 우리가 받는 상처의 주된 원인이다. 우리는 맹목적인 사랑이 꿈같은 이야기인 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 꿈이 외면을 당할 때에는 속쓰림에 잠 못 이루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CCM이 비웃음거리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이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이 노래는 태어남의 의미를 사랑과 결부시키고자 한다. 삶의 이유가 사랑받음에 있다고 노래하는 이 천진난만함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안다. 그런 의미라면 애초에 성가로 불려질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 노래는 어쩌면 진실에 매우 가까울지도 모른다. 낭만의 안개를 걷고 생각하더라도, 우리가 조건을 따르지 않는 사랑을 받을 때에 인생 최대의 충만함을 경험한다는 주장이 그렇게 과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CCM뿐 아니라 대중가요의 사랑 역시 조건을 달지 않거나 최소한에 그친다. 조건적 사랑을 자랑하는 노래가 보편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여튼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구는 맹목의 사랑을 지향한다. 이 욕구가 충족될 수록—우리가 받는 사랑이 눈먼 것일 수록, 우리의 삶은 충만해 지고 생생해 질 것이다. 논리의 비약을 한 번 더 감행하자면, 이 사랑받음이 진실될 수록 우리 인생의 진실성 역시 담보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진술이 참에 가까운 것은 아닐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 한켠에서 사랑을 받으려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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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네

나의 글/긴 글 2017. 5. 31. 19:16

군대 가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학교에 갈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아버지 세대 특유의 근면함으로 일평생 살아오신 분으로서, 게으름이 바탕인 나하고는 아주 다른 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침이 아주 쥐약이었다. 나의 능력으로 아침에 눈을 떠서 학교에 가고, 일을 하러 가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솔직히 여전히 그런 능력이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지만, 옛날보단 나아졌다는 이야기).


하여간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아버지의 근면함에 기생하여 등교를 해 왔다. 아버지랑 같이 집을 나서는 시간은 보통 여섯시에서 여섯시반 사이. 이르면 여섯시 이전에도 종종 집을 나서곤 했다. 당연히 나는 아버지가 지하철 역에 내려주실 때까지 차에서 잠만 자다가 내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떤 날은 정신이 멀쩡하여 지하철 역까지 깨어서 갈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조금 더 깨어 있다가 잘 때도 있었다. 물론 차에 타자마자 시트를 한껏 뒤로 젖히고 바로 곯아떨어지는 날이 훨씬 많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집에서 차로 십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한 만둣집이 있다. 사실 만두만 파는 것은 아니고, 찐빵, 김밥 같이 몇몇 분식들도 판다. 그 가게의 이름은 '정가네'인데, 아마 전국에 이런 이름을 가진 식당이 오백 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정가네는 아버지가 출근길에 자주 들르시는 가게다. 정신없이 자다 일어나 차에서 내릴 때면 아버지께서 정가네 만두와 김밥을 손에 쥐어주신 적이 많다. 정가네는 늘 새벽같이 가게를 열고, 재료를 준비하는 듯 했다. 포슬한 밥과 신선한 야채는 만두와 김밥이라는 음식이 어디까지 청량한 느낌을 낼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 음식들에 청량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정가네의 음식은 시리고 풋풋한 새벽과 닮아 있다.


정가네는 우리가 아무리 일찍 출발해도 언제나 열려 있었다. 여섯시반쯤에 정가네 앞을 지나갈 때에는 그저 조금 일찍 문을 여는 가게인 줄 알았다. 여섯시에 정가네 앞을 지나갈 때에는 사장님이 제법 부지런하시다고 생각했다. 여섯시 이전에 정가네 앞을 지나갈 때에는 도대체 저 가게는 몇 시에 여는 것인지 궁금해 졌다. 그 사장님은 언제나 만두피를 반죽하거나 만두소를 만들고 있거나 김밥재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그 자체로 매우 게으른 사람이어서 그런지, 늘 동일하게, 근면하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상당한 존경심과 함께 가벼운 행복감을 느낀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나는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에 안전함을 느낀다. 그들 덕에 이 세상이 이렇게나마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정가네의 일만이 아니다. 매일 밤 열한시 어간이면 쓰레기를 수거해 가시는 미화원 분들이나,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출근을 하던 어떤 이름 모를 형님(그분은 나보다 형님임이 확실하다)을 볼 때에도 그렇다. 이뿐일까. 제가끔의 규칙성과 치열함으로 오늘 하루를 젖혀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그들의 윤리이고 우리의 윤리이며, 내가 가장 흠모하는 윤리 중 하나이다. 나는 이 세상의 한 작은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운 것은 내 톱니의 이빨이 나가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랑 함께 출근길에 오른지가 오래다. 따라서 정가네의 만두와 김밥을 먹어본지도 오래다(정가네는 우리 학교에서 너무 멀다). 나는 특히 정가네의 김밥을 좋아한다. 정가네 김밥에 있는 참기름의 윤기, 통깨의 비주얼적 긴장, 쌀의 찰기, 야채의 신선함을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깨어물고 목구멍으로 밀어 넘길 때에, 비로소 이 세상이 확고하고 안전하게 흘러감을 인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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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이야기 2

나의 글/긴 글 2015. 11. 20. 19:59

1. 닫혀 있는 변기 뚜껑은 무섭다. 그냥 닫혀 있기만 하는 건데도,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조심스럽게 변기뚜껑을 들어 본다. 아, 다행히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앞선 사람의 고약한 뒷처리에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긴장을 맛 보았다. 물론 더 고약한 뒷처리를 남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긴 하다. 그래도 닫혀 있는 변기 뚜껑은 다음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처사에서 나온다. 제발 변기 뚜껑 좀 닫고 가지 말아주세요.


2. 한껏 밀려오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밀려나가려는 녀석들을 온 힘 다해 부여잡고 간신히 변기에 앉는다. 오늘도 일촉즉발의 위기였어. 참사를 면했다는 안도감과 통쾌하게 비워지는 시원함도 잠시, 휴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쩐다, 여기엔 나밖에 없고 오늘은 양말도 안 신었다. 급한 불을 끄느라 여기까진 고려하지 못 했는데. 아직 닦아내지 못 해 출구 근처에 서성이고 있는 남은 녀석들도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이 기분은 앞선 쾌감을 허망케 하고 있다. 조치가 필요하다.

옳거니, 쓰레기통 맨 위에 소복히 얹어져 있는 휴지 뭉치가 있구나. 앞선 사람은 휴지 아까운 줄 모르고 손에 둘둘 감고서 정작 대부분의 휴지엔 녀석들을 묻히지도 않은 채 버리는 사람이었나 보다. 어딜 가나 그런 사람은 꼭 있다니깐. 게다가 녀석들을 닦아낼 때에, 처음의 왕건이만 닦아내고 나면 나머지는 잔챙이들밖에 없어서 나중에 버려지는 휴지일수록 적은 부분만 오염되는 것이다. 하물며 이렇게 헤픈 사람의 마지막 휴지란, 거진 새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나의 과학적인 판단에 경의를.

자, 얼른 시작하자. 우선 오염된 부분을 조심스레 제거한다. 자칫하다간 휘적휘적 오염부위만 늘어난다. 옳지. 이젠 재활용되는 휴지를 조금씩 조금씩 끊어내어 사용한다. 처음에는 큰맘 먹고 세 칸을 뜯는다. 처음을 아끼면 왕건이가 삐져나오거나 닦아내다가 손가락에 스칠 위험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두 칸 정도로 충분하다.

됐다, 오늘도 이렇게 위기를 넘겼다. 고마워요, 이름 모를 똥싼 이여. 당신의 낭비벽이 나를 구제해 주었어요.


3. 앗, 오늘 점심은 카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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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서해에 빠뜨리고 만 나의 동그란 안경(일명 존 레넌 안경)은 꽤 특징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의 시선을 끌곤 했다. 개화기 지식인들이 꼈을 법한 디자인 덕에, 나의 전공인 철학과 그 안경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야, 안경 특이하네. 전공이 뭐세요? 철학과? 역시... 그래서 그런 안경 끼는 거예요?


아니. 그래서 그런 안경을 꼈던 것은 아니다. 난 그저 존 레넌처럼 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경영학을, 실용음악을, 공학을, 연극영화학을 전공했다 한들 나는 그 안경을 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철학을 공부했고,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물한 살 이후로 그 안경에 대한 질문과 함께 나는 이 질문도 정말 숱하게 들어야만 했다; 삶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혹은 이 상황(또는 물건)을 철학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아, 정말이지 이런 질문들은 난처하다. 나는 철학도哲學徒, 그것도 학부 공부 3, 4년 한 게 고작인 사람일 뿐이다. 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한갓 철학을 공부한 사람에 지나지 않아서 언제나 인생의 오의奧義를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삶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버겁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내가 공수교육을 받을 때의 일인데, 지상교육이 끝나고 모형탑에서 교육을 받을 때였다. 11미터의 모형탑에서 이탈을 하는 것은 상당히 긴장되는 일이기 때문에 교육생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교관들이 말을 걸어주기도 한다. 나 역시 뛸 생각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는데, 한 교관이 말을 걸었다.

-자네는 안경이 참 특이하구만 그래. 밖에서 뭘 하다 왔나. 뭐? 철학? 그래. 그럼 자네가 모형탑에서 뛰어내린 다음에 다시 여기로 올라올 때까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30초 동안 말할 수 있게 준비해 오도록.

지금 여기서 뛰어내리고 교육 받는 것도 벅찬데 삶에 대한 정의라... 그 정신 없는 와중에도 나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했다. 마침 그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칸트의 윤리학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갖고서 준비를 했다. 마침내 모형탑에 올라가 그 교관 앞에 다시 서게 된 나. 행복의 추구와 인간성의 관계에서부터 칸트의 유명한 '네 의지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원리로 타당한가 살펴보라'까지 설파하기에 이른다. 나는 또 어김없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했다.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한테는 일본어로 말해봐, 미대생한테는 그림 그려봐, 노래를 전공한 사람한테는 노래해봐, 이러는 사람은 어딜 가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하기 때문에 전공 삼는 것이 아니라 잘 하기 위하여 전공 삼는 것이다. 물론 해당하는 전공을 갖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소양은 있어야 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크박스처럼 버튼을 누르면 바로 좔좔좔 쏟아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는 게 어디 쉽게 얻어지는 것인가. 비非전공자인 여러분 보다야는 잘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철학도에게 철학에서 말하는 삶이 무엇인지 한 번쯤은 듣고 싶어하는 그네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또 어쩌면 철학을 전공하는 모든 이에게는 아주 조금씩이라도 삶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세상에 공급해야 하는 업業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철학의 쓸모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기왕이면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남을 수록 보장되는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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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이야기

나의 글/긴 글 2015. 5. 31. 16:52

나에게 의식다운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후로, 언제나 나의 관심을 끌었던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똥이다. 먹어야 사는 거의 모든 존재가 몸의 어딘가로는 반드시 내보내야 하는 그것 말이다. 여기서 거의 모든 존재라고 쓴 이유는, 아직 배변을 하지 않는 동물이 확실히 없다는 자료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지만, 앞으로 이어질 내용은 읽으시는 분들의 심기를 다소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아예 읽지 않으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군대에서 한동안 화장실 청소, 그중에서도 변기 청소를 전담했던 나는 언제나 가능한 한 변기를 꼼꼼히 닦으려 했다. 군대나 학교와 같이 시설 관리를 해당 구성원들이 담당하는 경우에는 그다지 화장실 청소를 성실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대체로 복불복이거나 징계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보통 변기 청소를 할 때에는 변기 커버에서 배변자의 엉덩이가 닿는 부분과 우리가 똥을 내버릴 수 있는 움푹 파인 그릇(?) 부분만을 휴지와 솔로 슥삭슥삭 닦아내는 사람이 많다. 즉 보이는 부분만 깨끗하게 하려는 심산인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숙인다면, 그곳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똥이 튀어져 있다. 언젠가 위기탈출 넘버원에서도 방송한 것이지만, 일을 보고난 후 물을 내릴 때에 변기 뚜껑을 덮는 것과 덮지 않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이 내보내는 똥의 질량과 크기는 엄청나기 때문에 그만큼 강한 수압이 요구되고, 똥을 흘려보낼 때 발생하는 물보라는 생각보다 훨씬 멀리, 많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간다. 그래서 변기 뚜껑을 덮지 않고 물을 내리게 되면 그것이 칫솔이며 컵이며 온갖 곳에 날아가게 되고, 기껏 내보낸 그것들은 다시 우리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변기와 멀찍이 있는 칫솔에도 그 똥국물이 튀는 마당에, 하물며 변기 자체는 어떠하겠는가. 청소할 때에 놓치기 쉬운 변기 커버의 아랫 부분과 그 커버를 받치는 윗 테두리 등에는 정말 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나는 그런 부분들이 방치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그 부분을 특히 더 신경써서, 똥국물이 튄 자국 하나하나 세세히 지워나갔다. 그러면서 '우리의 엉덩이에도 적지 않은 똥국물이 튀고 있겠군'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확실히 묵직한 그것은 떨어지면서 첨벙, 많은 물방울을 만들지 않나.


고등학생 때였나 하루는 급식으로 카레가 나왔었다. 그때 나와 같이 밥을 먹은 한 친구는 비위가 약했었는데, 밥 먹는 데 똥 얘기를 하는 걸 정말 못 견뎌하는 친구였다. 짓궂은 마음이 들은 나는 카레가 나오자 사정없이 똥 얘기를 해댔고, '똥 먹는 데 카레 얘기하지 마라'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짱구는 못말려에 나오는 대사였다. 결국 그 친구는 반도 안 먹은 밥을 버렸고, 그 일로 미안해진 나는 다시는 그 친구 앞에서 똥 먹는 데 카레... 아니, 밥 먹는 데 똥 얘기를 하지 않았다. 된장국이 나온 어느날 속으로 키득 거리기만 하며 똥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스스로를 대견히 여기면서. 하지만 그 이후로도 여전히, 지금까지도 나는 똥 얘기가 좋다.


아마 나는 똥 그 자체보다도 쾌변이 주는 흐뭇함을 좋아하는 것 같다. 또 그 누구도 똥을 싸지 않고는 못 살며, 아무리 이쁘게 장식한 음식이라도 그것이 두 번째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볼 때에는 개밥처럼 생긴 밥을 먹었을 때와 동일한 모양으로 나온다는 공평함 때문에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이쁜 여자라도 못생긴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똥을 만들어낼 재간은 없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존재의 잠정적인 마지막 단계라는 점에서 인간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 앞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만든다.


지금도 전 세계의 수십억을 헤아리는 우리 인간들은 똥을 싸고 있다. 언젠가 중국인들이 동시에 백두산 천지에 오줌을 누면 그것이 흘러넘쳐 홍수를 이룰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굳이 중국인들까지 갈 것 있나 싶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힘만으로도 그러한 과업은 이뤄낼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그보다 더 거대한 집단인 인류가 매일 싸대는 그 똥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고작해야 개똥이나 새똥만 군데군데 나뒹구는 이 신비로움이란. 역시 대지는 우리의 똥들을 받아들이고도 남을 만한 도량을 갖고 있구나.


난데없는 똥 얘기에 당황하거나 불쾌해 하실 분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다음에는 더 진지하거나 더 재밌는 똥글(말 그대로 똥에 대한 글)로 인사드리고 싶다. 똥 얘기는 더이상은 naver를 외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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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불법 다운로드입니다. 저작권으로 보호받는 저작물을 정당한 대가 없이 즐기는 그것 말입니다. 저 역시 한 때는 당나귀, 프루나, 토렌트, 각종 웹하드를 많이 이용했었기 때문에 감히 뭐라 할 주제는 못 됩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다루고 싶었던 주제이기에, 감히 적어보겠습니다.


저는 불법 다운로드가 도둑질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둑질이라는 단어가 불쾌하실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그냥 도둑질일 뿐입니다. 우리는 설렁탕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계산 없이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뉴스에 가끔 나오는 먹튀꾼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건 설렁탕 한 그릇을 즐겼으면 그에 마땅한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값을 안 냈다가는 경찰서에 가게 되고, 덤으로 뉴스에도 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음악, 소설, 영화, 소프트웨어 등등 우리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쉽게 훔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은가 봅니다. 그것들을 돈 내고 즐기기엔 나의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을 훔쳐봤자 경찰서나 뉴스에 소환될 가능성은 설렁탕 먹튀보다는 한참 낮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나쁘고 말이 안 되는 생각입니다. 앞의 생각이든 뒤의 생각이든 다 그렇습니다. 설렁탕을 먹고 즐기는 데에 쓰는 돈은 아깝지 않으면서 저작물을 이용하고 즐기는 데에 쓰는 돈은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발 돈 들일 가치도 없는 그것들에 소비되는 시간도 아까워할 줄 알았음 좋겠습니다. 또 잡혀갈 걱정이 없으니 훔쳐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인이 자리를 비워 적발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설렁탕 집에 들어가서 마음껏 설렁탕을 퍼먹고 나올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시간 아까운 줄 알고, 스스로에게 양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왜 그토록 저작물에 대해서는 무딘 태도를 갖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딘 태도라니, 말 참 곱게 한 것 같습니다.


창작자가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하려면 결국에는 자신의 창작물로 먹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작가 지망생에게 굶어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냅니까? 자신이 창작한 글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팔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수준 높은 글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글로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는 되는 글쟁이들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음악, 소설, 영화, 소프트웨어 등등 모든 창작물은 창작자에게 어느정도의 영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결코 지속가능할 수가 없습니다. 설렁탕집이 설렁탕을 못 팔면 설렁탕집일 수 없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합리적인' 소비자인 우리가 맛 없는 설렁탕집을 먹여살릴 의무는 전혀 없듯이, 질 낮은 저작물만드는 창작자에게 이익을 보장할 이유 또한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맛집의 설렁탕은 누구라도 돈을 내고 먹어야 하는 게 상식인 반면, 잘 만든 저작물은 돈을 안 내고 이용해도 괜찮다는 몰상식이 상식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엔 정말이지 치가 떨립니다. 그것을 너무너무 이용하고는 싶은데, 그만큼의 금전적 여유는 없으니 어떡하느냐 하는 성토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집 설렁탕이 너무너무 먹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먹고 튀겠다라는 생각이 용납될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을 향유할 만한 돈이 없으면 그냥 즐기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아니, 즐길 수 없는 겁니다. 설렁탕은 의식주에 들어갈 만큼 생활에 필수적인 영역에 있는 거고, 대개의 저작물은 필수적인 영역에서 순위가 설렁탕에 비해 낮은 만큼 아무래도 지출의 우선순위가 설렁탕보다는 낮지 않겠느냐는, 그래서 설렁탕은 기꺼이 돈을 낼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저작물에 돈을 낼 수 없다는 주장 또한 용납될 수 없습니다. 돈은 부족한데 밥은 먹어야겠는 사람은, 설렁탕보다 싼 걸 먹을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즐기고는 싶은데 돈이 없는 사람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더 적은 비용으로 즐길 궁리를 해야 하는 겁니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으니까, 긍정적인 부분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돈 내고 먹는 밥보다 공짜밥이 더 맛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돈 내고 즐기는 저작물은 돈 안 내고 즐기는 그것에 비해 다가오는 바가 확연히 다릅니다. 본전을 뽑아야 하니 더 꼼꼼히 즐기고 꼼꼼히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돈을 내고 선택한 저작물이 만족스럽다면, 다음에 또 돈을 내고 즐기고 싶어집니다. 결국 다시 돈을 내고 어떤 저작물을 소비할 것이고, 이것은 선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엔 그랬습니다.


저도 한 때는 생각없이 불법 다운로드를 자행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각성을 한 후부터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만 즐기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통념은 정말이지 거지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도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잘 먹고 잘 입고 싶은 욕망이 없을 리 없습니다. 사람 사는 것, 사람 바라는 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맛있는 설렁탕집 주인이 설렁탕 그릇그릇마다 이익을 보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신다면, 잘 만든 저작물 하나하나로 저작권자가 이익을 보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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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이야기, 두 번째



나는 육군 운전병이다. 따라서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서 바로 자대에 배치받는 것이 아니라, 수송교육단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은 후에야 자대로 갈 수 있었다. 나는 소형차 운전병이기 때문에 2주 간의 교육만 받으면 됐다. 이 이야기는 그 2주 동안 수송교육단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다.


수송교육단은 차종을 소형/중형/대형 세 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실시하는데, 첫 3일 동안은 그저 몸이 밀려들어가는 대로 생활관을 쓰지만, 일단 이 3일 동안 진행되는 전산분류, 기량점검을 통한 분류를 거치고나면 차종별로 생활관을 쓰게 된다. 이때 소형반의 경우에는 생활관에 나이순으로 나뉘어 들어가므로, 스물다섯에 입대한 나는 맨 앞 생활관에 들어갔다. 내 바로 옆 자리를 썼던 동갑내기 Y는 입대 전 초등학교 교사 일을 하다 왔다. 선굵은 외모와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직업이었다. 그리고 Y는 내가 여지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재밌는 사람 중 하나였다.


Y의 대학시절, 그에게 있어 여자후배는 단 두 부류만 존재했다. 밥과 술. 신입생 OT와 같은 자리에서 신입생과 재학생이 처음 대면할 때, 그 왁자한 분위기를 힘입어 밥약속을 우루루 잡는 것은 우리네 대학문화다. Y 역시 새내기들에게 밥을 사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바, 약속을 잡는다. 근데 여기서 알고리즘이 적용되는데, 이쁜 여후배에게는 술약속, 그저 그런 여후배(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죄송하게 생각한다.)에게는 밥약속을 잡는 것이다. '술 먹자'는 곧 '이쁘다'가 되고, '밥 먹자'는 생각하시는 대로다. 남자 후배에게는? 그에게 있어 남자는 있어도 남자 후배 같은 건 없다나. 하여간 이러한 프로세스가 매년 반복되다 보니, 그 한결 같음에 Y의 친구와 선후배들은 이를 속물적이라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어떤 도전의식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여후배가 Y에게 어떤 약속을 받느냐 지켜보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XX학번 ○○○입니다.

-그래, 술 먹자. 반가워.

-안녕하세요, 선배님. XX학번 △△△입니다.

-그래그래, 밥 먹자.


어떤 후배는 이렇게 물어보기도 한다.


-선배님, 저는 술이예요, 밥이예요?

-넌 당연히 밥이지!



하루는 책을 읽고 있던 나에게 Y가 말하길, 본인이 평생을 살며 완독한 책이 딱 두 권 있는데 한 권은 <어린 왕자>이고 한 권은 애견 사육 가이드였다고 한다. <어린 왕자>는 초등학생 때인가 읽었으며, 애견 서적은 비교적 최근에 읽었는데, 그가 갈색푸들을 입양하고서였다. 그 강아지를 잘 키우고 싶었던 마음에 읽었다는데, 이제껏 그렇게 진지하고 재밌게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고. 평생의 독서량이 단 두권인데도─과장일 가능성이 다분하지만─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다소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서울, 경기, 인천 지역의 유흥가와 윤락업소는 줄줄이 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단일 어휘 중에 활용빈도가 가장 높은 어휘는 "쓰벌"이었다. 사실 "쓰벌"의 원형이 되는 그 욕은, 한국인의 희노애락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입체적이고 풍부한 함의를 지닌 전천후 어휘이긴 하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울 때에, 나의 감정이 어떠하건 간에 그 욕은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 진리를 Y는 간파했던 걸까. 그에게 "쓰벌"은 누구를 겨냥한 것이라기 보다는 감탄사 내지는 날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살면서 그 단어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이 들었던 적이 없다.


수료식을 3일 남겨둔 날, 다시 말하면 자대배치까지 3일 남은 그날에, 별안간 Y의 머리가 3mm로 밀어져 있었다. 그날 Y가 동기생 한 명에게 이발을 부탁했는데, 모히칸 스타일을 만든다는 게 그만 민머리에 김을 얹은 듯한 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아마 좌우대칭을 맞추려 조금씩 옆머리를 파내다가 그만 참사가 벌어진 듯 싶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머리를 견딜 수 없었던 Y는 아예 온 머리를 3mm로 밀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자대배치 3일 전에.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시켜드리자면, 군대는 병사들에게 대머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병이 아니고서야 기간병에게는 옆 뒷 머리가 정돈된 스포츠 머리를 권장하며, 훈련병에게조차 3mm는 눈총을 감수해야 하는 길이이다. 중고등학교에서도 그러하듯이 과도하게 짧은 머리는 오히려 반항의 이미지를 준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무던히 묻혀가는 것이 상책인 군대에서 튄다는 것은 이익보다는 불이익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된다. 안 그래도 선이 굵은 외모의 Y가 삭발을 하니 흡사 달마대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수료를 얼마 안 남긴 날에도 Y는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예의 "쓰벌"이 더욱 자주 들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야한 생각으로 발모를 하겠답시고 온갖 선정적인 말들을 입에 물었는데, 삼 일 동안 "섹스"라는 단어만 백 번은 족히 들었던 듯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퍼런 구슬이 시커매질 리는 없었다. 그 용모는 우리가 헤어질 때까지 적응이 안 되어서 각각 자대로 이동하기까지 우리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여자후배를 밥과 술로 나누는 과감한 이분법, 일생의 독서량은 단 두 권, 그러면서도 술집과 성매매업소에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쓰벌"애용가, 헤비스모커에 주당인 Y는 교대생─초등학교 교사가 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모조리 뒤엎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 동기생이 '그렇게 여자를 좋아하는 놈이 무슨 선생이냐'고 하자, '애들만 안 건드리면 된다'고 응수했던 Y는, 어쩌면 놀기 좋아하는 모습 이면에 투철한 직업정신을 소유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보름도 안 되는 시간만으로는 누군가를 완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유쾌한 모습 외에도 낙심한 동기생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거나, 아는 것 이상으로는 아는 체 하지 않으려는 겸손함이나 노래를 굉장히 맛깔나게 잘 부르는 면모들은 Y라는 사람의 입체성을 증명해주었다. 이것은 나에게 인물 창작에 있어 더없이 좋은 교범이 될 듯 하다.


자대배치 받기 전의 교육생일 때에는 장군차 운전병이 편하리라는 썰에 혹하기 십상이다. 특히 우리 같은 소형반은 장군차 운전병, 이른바 '스타레이서'에 대한 야무진 기대를 한 번쯤은 하게 되는데, Y는 혹여나 장군의 부인께서 젊은 자신을 유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더 야무진 기대(?)를 했었다. 혼자서 3류 에로영화의 스토리를 읊어대다가 본인이 한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진심으로 갈등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여준 Y가 자대배치 이후에 진짜로 스타레이서가 되었을지 궁금하다.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 특유의 익살로 잘 지내고 있기야 하겠지만.


Y와는 연락처를 주고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 연락할 일도, 만날 일도 없겠지만 혹여나 훗날 나의 자식이 다니게 될 학교의 선생으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그 때에는 인간으로서의 교사에 대한 진실을 한 꺼풀 벗겨준 그에게 보답의 저녁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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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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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닥치는 대로 읽고 쓰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이 조금 안 되는 과거의 한 시점에, 나는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발단은 영화 <레옹>이었다. 그 영화가 나에게 준 여운은 대단했기에, 나는 영화라는 것에 그렇게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평생을, 이 대단한 매체에 몸 담으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지금까지도 그것은 내 삶의 강력한 추동력 중 하나이다. 내가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쓰고 있다면, 영화를 더 재밌게 보고, 나아가 좋은 영화를 단 한 편이라도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십 년 전 그 시점에 내 삶에 찾아온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이다. 비록 영화가 나의 가장 친애하는 매체일지라도, 언제나 나의 보물 1호는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이었다. 요새는 그분의 작품이 거의 다 복간이 되어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천만다행이다. 그분의 작품들은 십대 시절 나의 감수성과 정서를 모조리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러하다.


<레옹>은 분명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그게 다다. 상업영화로서 그만한 성취도 대단한 것이긴 하다. 그래도 그 영화는 결국 그 정도다. 그러나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은 나에게 만화란 무엇인가를 넘어서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려주었다. 당연히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십대 시절의 나는 참을성이 좋지 않았다. 내가 다 읽어낸 책은 손에 꼽았고, 그런 방정맞은 독서법을 가진 나에게 재독, 삼독을 하게 만든 책이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이다. 그 작품들을 수없이 읽어내면서 나는 예술가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인물을 자기 마음껏 주무르는 경악스러운 광경을 끊임없이 목격하며 자라왔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창작을 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고우영 선생님이 정답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그분의 방법과 깊이는 절대적이다. 아마 나는 평생 고우영 선생님을 모방하며 살아갈 것 같다.


'내가 요즘 왜 이렇게 글을 많이 읽고 써댈까'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마구 적어내려가는 이 글은, 고우영 선생님에 대한 본격적인 글이 아니다. 그냥 손 가는 대로 쓰는 것일 뿐, 그분의 대표작인 <일지매>,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등등에 대해 언급하려면 아직 이 정도의 분량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반의 반도 못 담아낸 것이다.


고우영 선생님 외에도 윤태호, 박시백, 박흥용, 이노우에 타케히코 같은 만화가들이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걸작을 구상하거나 만들고 있을 전 세계의 수많은 영화감독들 역시 그러하고, 김훈이나 황석영 같은 문필가들 또한 나를 길러주고 있다. 하지만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나의 인생과 시야를 바꾼 단 한 명의 예술가. 그 사람은 근 십여 년간 나에게 예술을 가르쳐왔고, 지금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반드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고우영 선생님이다. 나는 아직도 고우영 선생님의 작품들을 넘어서는 그 어떤 창작물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이 글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 영화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고우영 선생님었다는, 앞선 단락과는 주제가 맞지 않는 이상한 글이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감독이 하고 싶지, 만화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영화 역시 고우영 선생님 못지 않은 하나의 축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다소 텐션이 올라가 있는 글을 썼다. 나중에 반드시 나의 시간과 능력을 내어서 고우영 선생님과 그분의 작품들을 소개해드리겠다. 그때에는 지금보다는 좀 더 차분하게 쓸 수 있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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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이야기, 첫 번째


그는 훈련 기간 중의 선탑자(운전보조자)였다. 사내답고 호방한 성격의 중대장. 언제나 그는 일인칭을 '엉아'라고 했다. 그를 조수석에 앉히고 운전을 하다보면, 그가 하는 통화의 내용들이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리게 된다. 대부분은 공적인 통화다. 훈련 기간이니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사적인 통화도 있는 듯, 퇴근 이후의 일정이라든가 오늘은 뭘 먹었는지 등 유난히 귀에 박히는 내용들도 있었다. 그럴 때에 그의 목소리는 퍽 부드러워서, 여자친구 내지는 배우자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그는 나에게 '짝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하루는 유락시설이 늘어져 있는 도로를 달리다가, 우리는 이런 곳이 바로 불륜의 온상이 아니겠느냐며 말을 주고 받았다. 길가 공터에 주차된 차를 보며 카섹스를 예견하는 등, 군인들다운─정확히 말하면 숫놈들다운 대화를 했다. 불륜, 가정, 부부…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하다 보니 문득 이 사람은 연애를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난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자각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질문을 했다.


-중대장님, 사적인 질문 하나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어, 그래 물어봐

-혹시 여자친구 있으십니까?

-….

-죄송합니다.


'사적인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그의 손가락을 살피지 않았던 나의 부주의함에 대한 애석함과, 그에 대한 미안함으로 나의 말문은 막혀 있었다. 그런데,


-엉아가 작년 4월까지는 여자친구가 있었어.

-아... 그럼 아직 이별의 여파 때문에 애인을 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지 뭐. 한 2년 사귄 여자친구거든.

-예에...

-얼굴도 무척 이뻤어. ㅅ대학교 얼짱이었는데, 박신혜 닮았어. 내가 보기에도 이뻤던 것 같고. 몸매도 잘 빠지고. 그래서 데이트 하기 전에 (전)여자친구가 엉아를 기다리고 있잖아? 그럼 막 남자들이 와서 번호도 물어보고 그랬어.

-좋으셨겠습니다.

-좋았지. 결혼까지 생각했었는데. 엉아가 지금 아버지가 안 게셔. 울 아버지 돌아가실 때에도 (전)여자친구하고 같이 임종을 지켰으니까. 그때 나는 한 손으로 아버지 손 잡고, 한 손으로는 여자친구 손 잡고 그랬어. 우리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워낙에 성격이 이쁜 말을 못 하는 사람이어갖고 가시기 전에도 나하고 (전)여자친구한테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하셨어.

-그 정도로 가까우셨으면 정말 결혼하실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때야 그랬지.

-그럼 어쩌다 헤어지신 건지...

-어느 날엔가 데이트 하기 전에 점심을 먹으려고 순두부찌개 집엘 갔어. 근데 그날따라 (전)여자친구가 밥을 지저분하게 먹더라고. 공기밥 그릇에 찌개 덜어 먹는 거 알지? 막~ 그릇에 찌개 묻히고, 밥알도 여기저기 흘리고, 밥도 깨작 거리면서 먹고. 그게 보기 싫어서 밥을 왜 그렇게 먹냐고 했더니 갑자기 밥을 먹다 말더라? 그 길로 그냥 가게에서 나가길래, 쟤가 삐졌구나 하고 따라가서 잡았지. 미안하다고 계속 그러는데도 걔가 받아주질 않는 거야. '나는 언제나 너가 사과하면 받아줘야 하는 거냐'고 하더라고. 좀 열이 받데? 그래도 꾹 참고 (전)여자친구 손을 잡았어. 근데 손을 확 뿌리치는 거야. 내가 손 뿌리치는 걸 되게 싫어해. 걔는 그걸 알아. 알면서도 그런 거지. 그래서 나도 기분이 확 상해서 알았다고, 너 갈 길 가라고 했어. 뭐 그대로 데이트는 파토났지. 걔네 집까지 차로 태워다주는 동안 내가 그랬어.

"우리 진짜 안 맞는 거 같아. 오늘 모처럼 만나서 재밌게 놀려고 했는데 지금 밥 먹는 거 하나로도 이렇게 싸우잖아. 밥 하나 갖고도 이렇게 싸우는데 결혼하면 오죽하겠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성격이 이렇게 드세고 충돌이 잦은데 우리 너무 오래 사귄 것 같아."

이렇게 말하고 여자친구를 내려줬어. 원래 우리가 싸우면 항상 내가 먼저 연락했거든. 근데 이번엔 나도 연락을 안 했어. 그만큼 화났으니까. 근데 걔도 연락이 계속 없는 거야. 결국 내가 일주일 만에 먼저 연락했잖아. 그런데 여자친구가 그 사이에 마음의 정리를 마쳤나봐. 다시 연락을 했을 때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처음엔 삼 일까지 나의 연락을 기다렸대. 근데 삼 일이 넘어가니까 '우리가 헤어졌구나' 싶더라는 거야. 나중에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남자인 친구들은 안 그랬는데, 여자인 친구들은 내가 (전)여자친구를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한 말이 헤어지자는 말로 들릴 수 있었대. 내 뜻은 당연히, '우리가 이렇게 사소한 걸로 싸우니까 앞으로는 서로 좀 더 잘 해보자'였는데, 걔가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이렇게 사소한 걸로 싸우니까 진작에 헤어지자'였나봐. 그 뒤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사정사정 했는데도 끝까지 마음을 안 바꾸더라고. 집 앞까지 찾아가서 무릎도 꿇어보고 해도, 안돼. (전)여자친구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때 오빠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말할 정도였으면 다시 시작하실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결국엔 안 되더라고. 나중에야 드는 생각이, '그때 걔가 밥을 그렇게 먹었을 때, 먹기 싫어하는 것 같았을 때, 내가 그 밥을 대신 먹어줄걸.'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랬더라면 지금까지 사귀고 있을지도 몰랐는데.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그가 어른답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지만, 누구라도 실수가 실수인 줄 알았더라면, 그 말이 나에게 이별을 강요할 줄 알았더라면 누구도 실수하지 않고 누구도 이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말 때문에 이렇게 될 줄 몰랐었어.'라는 핑계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실수는 용서될 수 없고, 용서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이미 벌어졌을 따름이다.


-너도 보듯이 엉아가 성격이 세잖아. 또 게으른 걸 못 봐요. (전)여자친구랑 잘 맞는 부분도 많았어. 얼굴 박신혜지, 가슴 크지, 게다가 수학 선생님이라 항상 연필을 갖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거든. 근데 그거 있잖아, 여자들 펜 보관할 때 머리 긴 여자는 비녀처럼 머리에 꽂아서 하는 거. 여자친구가 그렇게 비녀 머리 하고 공부할 때에만 안경을 쓰는데, 딱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으면 뭔가 프로페셔널한 여성이 주는 매력도 있었다고. 속궁합도 아주 잘 맞아서 다 좋았는데 여자친구가 좀 게을렀어. 앞에 말했지만 엉아가 게으른 걸 못 보는데, 가끔 걔네 집에 가서 자고 일어나면 애가 깰 생각을 안 하더라고. 보통 손님이 오면 불편해서라도 일찍 깨잖아. 근데 뭐 볼 때마다 쳐 자. 내가 편해서 나한테만 그런 건가 했는데 걔네 어머니 말씀 들어보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더라고. 그걸 보면서 '내가 얘랑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싶긴 했었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헤어지진 않게 됐네.


그 뒤로도 그는 몇 번 정도 더 전 여자친구가 ㅅ대 얼짱이었다, 남자들한테서 번호 따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마 지금도 따이고 있을 거다 같은 얘기를 했고, 나도 그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제 갓 서른인데도 착실하게 돈을 모았고 유능한 이미지를 주는 그였지만, 장교로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진급의 벽 앞에서 결국 전역을 선택한다고 했다. 이제 반 년 정도 후에 그는 대위 전역을 하고 여행을 다니다가 공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한다고 했다. 직업군인에게 전역이란 새출발보다는 실직에 가까운 것이다. 실직을 반 년여 앞두고 있기에 그것 때문에라도 연애할 여유가 없다고 말한 그의 대답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하지만 그게 주된 이유일까 나는 생각했다. 나로서는 그의 생각을 알 만한 주제가 못 되었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모든 연인이 결혼을 하지는 않는다. 결혼을 바라지 않는 연인도, 결혼하지 않는 게 다행인 연인도 있다. 하지만 어느 연인도 헤어지길 원하며 연애를 시작하진 않는다. 그래서 이별을 지양하기 위해 제각기의 노력과 요령을 동원한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이별은 피치 못한 것이다. 위로받지 못할 슬픔을 견디고,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전 여자친구가 지저분하게 남긴 밥을 대신 먹어줬어야 했다는 그의 반성 때문에, 사랑과 엮인 이 모든 지랄을 긍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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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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