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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우리 인생의 (거의)모든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이를 다루기가 꺼려진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기가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그 표현수단이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상관없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의 (거의)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주제, 사랑에 대해 무언가 말하는 일은 난감하다. 그 어떤 주제보다 사랑을 얘기할 때 구태의연해 지기 마련인데, 나까지 굳이 이 세상에 이미 차고 넘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보탤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내가 어떤 내용을 적더라도 그것은 상투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첫째로는 나의 짧은 식견과 비루한 글솜씨 때문이고, 둘째로는—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인데, 이보다 참신하기 어려운 주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에 대해 무언가 주절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 역시 나의 (거의)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만하면 이 수준 낮은 글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생은 결국 맹목에 수긍한다. 맹목이라는 말 그대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눈먼 사람의 여행과 같다. 그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사람은 그저 태어났기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왜 사냐는 질문에 우리는 멋쩍은 웃음을 짓거나 불쾌한 감정을 가진다. 그 질문은 다분히 비일상적인 것으로서,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뉘앙스를 지닐 때가 많다. 이 질문이 도발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다 할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근원과 목적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다급한 문제도 아닐 뿐더러,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것은 우리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질문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가장 작은 행성은 무엇인가, 같이 아무래도 좋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에게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이 안드로메다의 문제와 매한가지로 무용한 것밖에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삶의 의미에 비하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분명한 어조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당연한 소리! 사랑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문제는 우리가 사랑을 원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이다. 나는 사랑을 맹목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인생처럼 눈먼 사람의 까닭모를 여정과 닮아 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이유를 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가 잘생겨서 좋아', '나는 너가 재밌어서 좋아'라는 말은 일견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사랑이 조건에 근거함을 의미한다. 즉, 그 조건을 충족할 때에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물론 조건과 이유가 완전히 배제된 사랑이 존재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조건은 최소한일 수록, 막연할 수록 좋다. 달리 말하면, 맹목적일 수록 좋다.
만약 어떤 사랑에 조건이 줄줄이 달려 있다면 그 사랑은 어찌 보일까. 이를테면 '나는 너가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재밌고, 돈도 잘벌고, 키도 크고, 학벌도 좋고, 부모님도 좋은 분이셔서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이 있다고 하자. 반면에 '나는 너가 못생기고, 운동도 못하고, 재미없고, 돈도 못벌고, 키도 작고, 학벌도 안 좋고, 부모님도 개차반이지만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은 어떠한가. 두 사랑고백 중에서 어떤 것에 더 진정성이 실려 있는 것 같은가. 우리는 누구나 맹목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맹목적인 사랑을 줄 만한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어떤 시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조건적인 사랑을 사고 판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유용한 방법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받을 수도 없는 우리에게 이런 시장마저 없다면, 우리는 영영 사랑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 완벽주의에 집착하면 피곤해 지는 법. 한계는 뛰어넘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라고 존재하는 것이지 않는가(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배우며 자란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안엔 달래지지 않는 욕망이 있다. 우리는 조건적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한다. 이 서글픈 이기심은 우리가 받는 상처의 주된 원인이다. 우리는 맹목적인 사랑이 꿈같은 이야기인 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 꿈이 외면을 당할 때에는 속쓰림에 잠 못 이루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CCM이 비웃음거리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이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이 노래는 태어남의 의미를 사랑과 결부시키고자 한다. 삶의 이유가 사랑받음에 있다고 노래하는 이 천진난만함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안다. 그런 의미라면 애초에 성가로 불려질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 노래는 어쩌면 진실에 매우 가까울지도 모른다. 낭만의 안개를 걷고 생각하더라도, 우리가 조건을 따르지 않는 사랑을 받을 때에 인생 최대의 충만함을 경험한다는 주장이 그렇게 과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CCM뿐 아니라 대중가요의 사랑 역시 조건을 달지 않거나 최소한에 그친다. 조건적 사랑을 자랑하는 노래가 보편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여튼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구는 맹목의 사랑을 지향한다. 이 욕구가 충족될 수록—우리가 받는 사랑이 눈먼 것일 수록, 우리의 삶은 충만해 지고 생생해 질 것이다. 논리의 비약을 한 번 더 감행하자면, 이 사랑받음이 진실될 수록 우리 인생의 진실성 역시 담보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진술이 참에 가까운 것은 아닐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 한켠에서 사랑을 받으려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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