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이야기 2

나의 글/긴 글 2015. 11. 20. 19:59

1. 닫혀 있는 변기 뚜껑은 무섭다. 그냥 닫혀 있기만 하는 건데도,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조심스럽게 변기뚜껑을 들어 본다. 아, 다행히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앞선 사람의 고약한 뒷처리에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긴장을 맛 보았다. 물론 더 고약한 뒷처리를 남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긴 하다. 그래도 닫혀 있는 변기 뚜껑은 다음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처사에서 나온다. 제발 변기 뚜껑 좀 닫고 가지 말아주세요.


2. 한껏 밀려오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밀려나가려는 녀석들을 온 힘 다해 부여잡고 간신히 변기에 앉는다. 오늘도 일촉즉발의 위기였어. 참사를 면했다는 안도감과 통쾌하게 비워지는 시원함도 잠시, 휴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쩐다, 여기엔 나밖에 없고 오늘은 양말도 안 신었다. 급한 불을 끄느라 여기까진 고려하지 못 했는데. 아직 닦아내지 못 해 출구 근처에 서성이고 있는 남은 녀석들도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다. 이 기분은 앞선 쾌감을 허망케 하고 있다. 조치가 필요하다.

옳거니, 쓰레기통 맨 위에 소복히 얹어져 있는 휴지 뭉치가 있구나. 앞선 사람은 휴지 아까운 줄 모르고 손에 둘둘 감고서 정작 대부분의 휴지엔 녀석들을 묻히지도 않은 채 버리는 사람이었나 보다. 어딜 가나 그런 사람은 꼭 있다니깐. 게다가 녀석들을 닦아낼 때에, 처음의 왕건이만 닦아내고 나면 나머지는 잔챙이들밖에 없어서 나중에 버려지는 휴지일수록 적은 부분만 오염되는 것이다. 하물며 이렇게 헤픈 사람의 마지막 휴지란, 거진 새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나의 과학적인 판단에 경의를.

자, 얼른 시작하자. 우선 오염된 부분을 조심스레 제거한다. 자칫하다간 휘적휘적 오염부위만 늘어난다. 옳지. 이젠 재활용되는 휴지를 조금씩 조금씩 끊어내어 사용한다. 처음에는 큰맘 먹고 세 칸을 뜯는다. 처음을 아끼면 왕건이가 삐져나오거나 닦아내다가 손가락에 스칠 위험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두 칸 정도로 충분하다.

됐다, 오늘도 이렇게 위기를 넘겼다. 고마워요, 이름 모를 똥싼 이여. 당신의 낭비벽이 나를 구제해 주었어요.


3. 앗, 오늘 점심은 카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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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나의 글/일기 2015. 11. 3. 19:30

이적의 노래를 듣노라면 뭉클해지는 데가 있다. 음악 자체가 뛰어나기도 하거니와, 그 음악을 들으면 위로받았던 기억이 슬몃슬몃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적의 노래는 언제나 들어왔지만 이상하게도 내 기분이 한없이 거지 같았을 때 집중적으로 들었던 듯한 인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지는 않았다. 여하튼 고3 때 비틀스의 노래와 더불어 귀에 딱지가 내려 앉을 만큼 빠져들어 들었던 이적의 노래를 요즘 다시 열심히 듣고 있다. 요즘은, 기분이 거지 같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그래도 자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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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픽션 2015. 11. 2. 20:04

그는 문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대단히 난처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며 신음을 하다가, 문고리를 만지작 거리고는 이내 다시 팔짱을 낀 채 안절부절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나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더랬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무슨 난처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에, 오늘 어르신께 볼일이 있어 왔었습니다요.

-그럼 어르신과의 볼일에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어르신과의 일은 잘 마쳤지요.

-그럼은...?

-예에,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니까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문 좀 닫고 나가주게"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 문 앞에 와서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아뿔싸, 분명히 어르신은 '문 좀 닫고 나가'라 하셨는데 이미 문을 열었지 뭡니까. 잽싸게 문을 도로 닫고서 분부하신 대로 하려니 이제는 문이 닫혀 있어 나갈 수가 있어야지요. 어르신을 실망시켜 드릴 수도 없고, 또 나갈 수도 없어서 이렇게 문 앞에서 혼자 끙끙대고 있습니다요.

-아...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예에?! 그럼, 무엇을 말씀하셨다는 겁니까?

-무엇이라니요. 문을 닫은 채로 나가라는 게 아니라 일단 나간 후에 문을 제대로 닫고 가달라는 것이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을 때에는 어련히 깊은 뜻이 있지 않겠나 싶어서요. 저 같은 게 함부로 주견을 내세웠다가는 그분을 실망시켜 드릴 뿐만 아니라,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않아 어떤 호된 꼴을 당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분명히 무슨 수가 있을 겝니다.

-선생님, 어르신에 대한 선생님의 존경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말에는 관용적 표현이란 게 있는 겁니다. 문자보다는 맥락이 중요할 때가 있다구요. 그러니 그냥 문을 열고 나가셔서 다시 문만 잘 닫으시면 될 듯 합니다.

-관용적 표현이니, 문자니, 맥락이니 하는 말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에게 하신 말씀에 감춰진 지혜를 찾겠습니다.

-물론 어르신의 '감춰진 지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문 앞에서 꾀를 찾으실 셈이십니까. 차라리 어르신께 돌아가 그분의 정확한 뜻을 물어보시지요. 아마 제가 말씀 드린 의미가 맞을 겁니다.

-아니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분이 하신 말씀 속에 감춰진 지혜를 찾고 또 찾을 겁니다. 이해력이 부족한 데다가 참을성까지 없는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되지요. 사실 방금 저는 어르신께 단단히 혼나고 가는 길이랍니다. 그분을 더 이상 실망시켜 드릴 순 없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 이러고 계신 모습이 어르신을 더 실망하게 할 것 같은데요.

-그만 하십시오. 그쪽에서 그러지 않으셔도 전 이미 충분히 힘듭니다. 그리고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실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가던 길 가주십시오. 더 이상은 저도 정중하게 대해 드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분 나쁘게 해 드렸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제가 드렸던 말씀을 꼭 좀 곰곰이 생각해주세요. 그럼 저는 어르신이 쓰셨을 관용적 표현의 맥락대로, 문을 열고 나가서 다시 잘 닫은 후에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혹시 그 '감춰진 지혜'를 찾으시거들랑 저에게도 알려주시고요.


이후 나는 그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만 그가 그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문에 구명을 뚫다 어르신께 걸려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는 소식만을 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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