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픽션 2015. 11. 2. 20:04

그는 문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대단히 난처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며 신음을 하다가, 문고리를 만지작 거리고는 이내 다시 팔짱을 낀 채 안절부절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나까지 불안하게 만들었더랬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무슨 난처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에, 오늘 어르신께 볼일이 있어 왔었습니다요.

-그럼 어르신과의 볼일에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어르신과의 일은 잘 마쳤지요.

-그럼은...?

-예에,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니까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문 좀 닫고 나가주게"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 문 앞에 와서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아뿔싸, 분명히 어르신은 '문 좀 닫고 나가'라 하셨는데 이미 문을 열었지 뭡니까. 잽싸게 문을 도로 닫고서 분부하신 대로 하려니 이제는 문이 닫혀 있어 나갈 수가 있어야지요. 어르신을 실망시켜 드릴 수도 없고, 또 나갈 수도 없어서 이렇게 문 앞에서 혼자 끙끙대고 있습니다요.

-아...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예에?! 그럼, 무엇을 말씀하셨다는 겁니까?

-무엇이라니요. 문을 닫은 채로 나가라는 게 아니라 일단 나간 후에 문을 제대로 닫고 가달라는 것이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셨을 때에는 어련히 깊은 뜻이 있지 않겠나 싶어서요. 저 같은 게 함부로 주견을 내세웠다가는 그분을 실망시켜 드릴 뿐만 아니라,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않아 어떤 호된 꼴을 당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분명히 무슨 수가 있을 겝니다.

-선생님, 어르신에 대한 선생님의 존경심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말에는 관용적 표현이란 게 있는 겁니다. 문자보다는 맥락이 중요할 때가 있다구요. 그러니 그냥 문을 열고 나가셔서 다시 문만 잘 닫으시면 될 듯 합니다.

-관용적 표현이니, 문자니, 맥락이니 하는 말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에게 하신 말씀에 감춰진 지혜를 찾겠습니다.

-물론 어르신의 '감춰진 지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문 앞에서 꾀를 찾으실 셈이십니까. 차라리 어르신께 돌아가 그분의 정확한 뜻을 물어보시지요. 아마 제가 말씀 드린 의미가 맞을 겁니다.

-아니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분이 하신 말씀 속에 감춰진 지혜를 찾고 또 찾을 겁니다. 이해력이 부족한 데다가 참을성까지 없는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되지요. 사실 방금 저는 어르신께 단단히 혼나고 가는 길이랍니다. 그분을 더 이상 실망시켜 드릴 순 없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 이러고 계신 모습이 어르신을 더 실망하게 할 것 같은데요.

-그만 하십시오. 그쪽에서 그러지 않으셔도 전 이미 충분히 힘듭니다. 그리고 제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실 생각이 아니라면, 그만 가던 길 가주십시오. 더 이상은 저도 정중하게 대해 드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기분 나쁘게 해 드렸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제가 드렸던 말씀을 꼭 좀 곰곰이 생각해주세요. 그럼 저는 어르신이 쓰셨을 관용적 표현의 맥락대로, 문을 열고 나가서 다시 잘 닫은 후에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혹시 그 '감춰진 지혜'를 찾으시거들랑 저에게도 알려주시고요.


이후 나는 그이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만 그가 그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문에 구명을 뚫다 어르신께 걸려 호된 꾸지람을 받았다는 소식만을 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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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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