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복싱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기본적으로 스포츠 영화가 주는 재미에 더해서, 복싱은 언더독의 이야기를 녹여내기에 가장 걸맞은 소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몸을 판다는 것에 강한 연민을 갖고 있죠. 두들겨 패며, 두들겨 맞아가며 상대를 쓰려뜨려야 하는 복싱의 처연함이란. 실제로 복싱은 상당한 엘리트 스포츠임에도, 우리가 복싱영화에서 마주하는 주인공들은 대개 갈 데까지 간 경우가 많습니다. 비교대상이 다소 엄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이것이 매춘과 비슷한 동기와 양상을 보인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정도로 복싱영화는 극적인 상황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록키는 지독한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루저입니다. 4라운드 복서에 일수쟁이인 그는 서른이 넘었지만 여전히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인생입니다. 그의 애인인 애드리안은 사회성이 심각하게 부족해 보이며, 그의 오빠인 폴리는 다혈질에 알코올 중독이죠. 그러한 록키에게 현 헤비급 세계챔피언인 아폴로 크리드와의 15라운드 매치가 결정되었습니다. 3류 복서를 상대로 하는 4라운드 게임도 힘겹게 이기는 록키에게 이 게임의 결말이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영화이죠.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영화니까 가능한 것 정도로 치부되기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 영화의 대사를 보실까요. "if I can go that distance, you see, and that bell rings and I'm still standin', I'm gonna know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see, that I weren't just another bum from the neighborhood."(내가 끝까지 갈 수 있다면, 그리고 벨이 울릴 때에도 내가 서있는다면, 그때 내 삶에서 처음으로 내가 양아치가 아님을 확인하게 될 거야.)
인간만큼 자기도취적이면서 또 자기연민적인 동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육중한 건축물과 온갖 기념물들을 봅시다. 인간이 일궈낸 모든 것을요. 그러한 것들을 볼 때면 저는 '우리는 정말 위대해'라며 도취감에 젖어있는 인간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스스로를 필요 이상으로 학대해가며 바보로 만들어가는 것도 인간이지요. 자책과 자학은 어느 정도 선까지는 반성을 하게 하고 보다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주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 번 스스로를 시시하게 여기기 시작한 사람은, 거기서 좀처럼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록키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동네의 소녀에게 선의의 충고를 해주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조롱이었고, 본인도 자신이 그 정도의 대접밖에 받지 못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록키가 정말로 그정도밖에 안 되는 3류 건달인가가 아니라, 그의 자아상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록키가 챔피언 아폴로 크리드와의 시합을 준비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영화사(史)적으로는 스테디캠이라는 테크닉의 도입으로, 이제는 하나의 기념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는, 록키의 훈련 과정 하나하나가 '나는 시시하지 않아!'라며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보입니다--물론 그러한 장면과 대사는 없습니다. 이 뼈 아프고 단내 나는 자기 극복의 과정 끝에 제가 좋아하는 위의 대사가 나옵니다. 비로소 자기의 시시하지 않음을 증명하기에 앞선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떨림일 것입니다. 저 역시도 스스로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편이기에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조작적인 설정에 영화적인 결말이라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록키는 이 세상의 모든 시시한 이들을 위한 헌사입니다. 시시한 여러분, 여러분은 시시하지 않습니다.
14.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