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리뷰/영화 2015. 3. 14. 15:01

<노예 12년>은 아직 미국이 자유주와 노예주로 양분되어 있던 시절, 자유주의 자유인이자 음악가였던 흑인 솔로몬 노섭이 노예 상인들에게 납치된 후 12년 간 노예 생활을 거치고 생환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미 동명의 자서전으로 출간되었고, 이는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더불어 남북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이야기가 담보하고 있는 뜨거움이 있고, 불편함이 있습니다. 삐딱하게 앉아서 볼 수 있는 성질의 영화가 아닙니다. 가공의 이야기 앞에서라도 그럴진대,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고 실제는 영화로 그려진 것보다 더 참혹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이러한 이야기가 으레히 주는 격렬한 감정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갈등과 고통이 극한에 이르는 상황들에 이를 때면, 촬영과 편집을 롱 테이크로 담아내어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지켜보게 합니다. 노예제도와 현재가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 만큼의 차이를, 스크린과 객석에 두려는 것인지 어떤 건지는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영화의 감독 스티브 맥퀸은 이 영화의 온도를 될 수 있는 한 쿨하게 맞추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슷한 시대와 소재를 다룬 영화, <장고: 분노의 추격자>와 대비됩니다. 현란한 편집과 음악의 사용, 뚜렷한 선악의 대립은 같은 소재의 다른 접근, 다른 감상을 요합니다. 여기에 무엇이 더 우월한 방법인가에 대한 평가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같이 생각해 볼 영화로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걸작 <쉰들러 리스트>가 있겠습니다. 둘 다 오스카 작품상 수상작이며(둘 다 오스카에 정조준 된 작품이기도 하지요.), 참혹한 상황에서의 구원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구원하는 자가, <노예 12년>에서는 구원받는 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저는 두 영화가 상당히 닮은 꼴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더럽고 끔찍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이란 것은 서로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인지, 두 영화를 볼 때의 기분이 묘하게 비슷했습니다. 하여간 잊지 말아야 하고, 잊을 만하면 고발 되어야 하는 일들입니다.

자유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봅시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무슨 권리로 타인의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가?'에 대한 거부 내지는 동의입니다. 괜히 여러 헌법들이 자유의 보장을 가장 앞선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다움의 주요한 성질 중 하나를 자유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자유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 산재해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노예제도처럼 눈에 띄는 이슈들이 줄었을 뿐입니다. 또 작금에는 무한정의 자유란 것이 결국 이카루스의 날개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 차라리 노예제도라는 절대악이 있었으면 갈등과 싸움의 노선이 보다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글쎄요, 우리가 굳이 그런 절대악의 힘을 다시 한 번 빌어야 하는 걸까요? 이제는 그런 거 없이도 보편 타당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시대를 맞이할 수는 없는 걸까요? 살아봐야 알 일입니다.


14.03.17.

'리뷰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를린  (0) 2015.03.15
500일의 썸머  (0) 2015.03.15
댄싱퀸  (0) 2015.03.15
잭 리처  (0) 2015.03.15
록키  (0) 2015.03.14
Posted by MarlonPai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