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네

나의 글/긴 글 2017. 5. 31. 19:16

군대 가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학교에 갈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아버지 세대 특유의 근면함으로 일평생 살아오신 분으로서, 게으름이 바탕인 나하고는 아주 다른 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에게는 아침이 아주 쥐약이었다. 나의 능력으로 아침에 눈을 떠서 학교에 가고, 일을 하러 가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솔직히 여전히 그런 능력이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지만, 옛날보단 나아졌다는 이야기).


하여간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아버지의 근면함에 기생하여 등교를 해 왔다. 아버지랑 같이 집을 나서는 시간은 보통 여섯시에서 여섯시반 사이. 이르면 여섯시 이전에도 종종 집을 나서곤 했다. 당연히 나는 아버지가 지하철 역에 내려주실 때까지 차에서 잠만 자다가 내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어떤 날은 정신이 멀쩡하여 지하철 역까지 깨어서 갈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조금 더 깨어 있다가 잘 때도 있었다. 물론 차에 타자마자 시트를 한껏 뒤로 젖히고 바로 곯아떨어지는 날이 훨씬 많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 집에서 차로 십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한 만둣집이 있다. 사실 만두만 파는 것은 아니고, 찐빵, 김밥 같이 몇몇 분식들도 판다. 그 가게의 이름은 '정가네'인데, 아마 전국에 이런 이름을 가진 식당이 오백 개는 족히 넘을 것 같다. 정가네는 아버지가 출근길에 자주 들르시는 가게다. 정신없이 자다 일어나 차에서 내릴 때면 아버지께서 정가네 만두와 김밥을 손에 쥐어주신 적이 많다. 정가네는 늘 새벽같이 가게를 열고, 재료를 준비하는 듯 했다. 포슬한 밥과 신선한 야채는 만두와 김밥이라는 음식이 어디까지 청량한 느낌을 낼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 음식들에 청량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정가네의 음식은 시리고 풋풋한 새벽과 닮아 있다.


정가네는 우리가 아무리 일찍 출발해도 언제나 열려 있었다. 여섯시반쯤에 정가네 앞을 지나갈 때에는 그저 조금 일찍 문을 여는 가게인 줄 알았다. 여섯시에 정가네 앞을 지나갈 때에는 사장님이 제법 부지런하시다고 생각했다. 여섯시 이전에 정가네 앞을 지나갈 때에는 도대체 저 가게는 몇 시에 여는 것인지 궁금해 졌다. 그 사장님은 언제나 만두피를 반죽하거나 만두소를 만들고 있거나 김밥재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그 자체로 매우 게으른 사람이어서 그런지, 늘 동일하게, 근면하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상당한 존경심과 함께 가벼운 행복감을 느낀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나는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에 안전함을 느낀다. 그들 덕에 이 세상이 이렇게나마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정가네의 일만이 아니다. 매일 밤 열한시 어간이면 쓰레기를 수거해 가시는 미화원 분들이나,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출근을 하던 어떤 이름 모를 형님(그분은 나보다 형님임이 확실하다)을 볼 때에도 그렇다. 이뿐일까. 제가끔의 규칙성과 치열함으로 오늘 하루를 젖혀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그들의 윤리이고 우리의 윤리이며, 내가 가장 흠모하는 윤리 중 하나이다. 나는 이 세상의 한 작은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운 것은 내 톱니의 이빨이 나가버리는 것이다.


아버지랑 함께 출근길에 오른지가 오래다. 따라서 정가네의 만두와 김밥을 먹어본지도 오래다(정가네는 우리 학교에서 너무 멀다). 나는 특히 정가네의 김밥을 좋아한다. 정가네 김밥에 있는 참기름의 윤기, 통깨의 비주얼적 긴장, 쌀의 찰기, 야채의 신선함을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깨어물고 목구멍으로 밀어 넘길 때에, 비로소 이 세상이 확고하고 안전하게 흘러감을 인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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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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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칼럼 – Court & Rights

1. 여는 말, 그리고 <에린 브로코비치>

 

여는 말

 

인류 전체 역사에서 인권이라는 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최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법전인 우르남무 법전에서도, 사람이라면 마땅히 보장받을 권리와 그에 따른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지식과 양심이 있는 곳이라면 사람다움에 대한 개념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인의 평등과 자유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는 최고의 법전이 만들어지고나서도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야만 했다. 작금의 시대엔 사람의 정의가 종적種的 특성에 따르지만, 한때는 성별, 피부색, 계급, 직업, 신념, 종교 따위에 따라 사람 대접을 받거나 받지 못하기도 했다.

앞에서도 법전을 잠깐 언급했지만, 인권과 법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권이 도덕적인 장려만으로도 지켜진다면 애초에 법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현실에서의 인권은 법의 보호와 강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또한 해당 사회에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꼴 짓는 데에도 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개인에게 어렴풋이 주어진 양심과 도덕감정만으로는 세세한 부분의 인권까지 챙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성문화된 사회적 합의––법이 그 모호함을 해소하는 데에 보탬이 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법은 만능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집행하는 법에는 모순도 많고 구멍도 많으며, 특히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의 법 집행은 인권의 수호가 아닌 압살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때보다는 문명화가 진행되었다는 지금에도 법은 인권 문제의 완전한 대책이 될 수 없는 것 같다. 시민들의 준법 의식은 여전히 갈 길이 멀고, 법 자체의 한계로 인하여 결국에는 보다 포괄적이고 자발적인 도덕 또는 다른 무언가에 의지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Court & Rights>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인 이 칼럼은 법이 인권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갖는 역할과 한계를 다룰 예정이다. ‘Court’라는 단어를 쓰는 만큼 법정, 재판 과정, 법조인 등을 그린 법정 영화들 위주로 소개할 것이다. 다만 심도 있는 법 관련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내러티브가 있고 접근성이 높은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 법정 영화의 재미 중 하나는 관객을 배심원으로 초청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권이 무엇이며,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권에는 무엇무엇이 있다고 기계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과 이야기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체험해 가는 것은 영화와 같은 서사예술의 미덕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힘센 사람들의 것인 마냥 보인다. 희망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낯뜨거운 일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법정 영화는 만들어진다. 법이 사람의 권리를 항상 담보해 주지는 못해도, 힘없는 사람의 권리가 법으로 보호 받는 순간은 종종 있다. 물론 그 순간은 흔치 않으며, 그래서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겠지만, 그 흔치 않게나마 보이는 순간 덕분에 희망이 아예 사그라지지 않는 것일 테다. 희망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고, 가능성은 힘의 다른 이름이다. 법정 영화를 함께 이야기하는 이 일이, 인권을 세워 나가는 데에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이 기획의 목적은 모두 달성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린 브로코비치>: 기업의 자유와 시민의 생존권에 관하여

 

자유라는 말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지난 역사는 얼마나 많은 피로 얼룩졌던가. 전쟁을 제외하면, 자유를 위한 투쟁만큼 시민의 피를 부른 사건은 찾기 힘들 것이다. 식민지배와 독재는 여전히 가까운 과거고, 그만큼 자유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사람답게 사는 조건의 전부는 아니다. 자유의 과포화 속에서는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생득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사람의 능력 간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에서 무제한의 자유와 경쟁이 허락될 경우 인간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를 바 없어진다. 물론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있는 한, 인간 사회가 여타 동물들의 그것과는 얼마간의 구별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일찍이 바이마르 헌법에서는, ‘경제생활의 질서가 모든 자에게 가치 있는 생활을 보장하는 정의의 원칙을 가져야 한다고 명시한 바 있다. 우리는 이것을생존권이라고 부르며, 자유권 및 평등권과 함께 인권의 가장 중요한 권리 중 하나로 꼽는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2000년작 <에린 브로코비치>는 거대 에너지기업 PG&E 힝클리 지사의 중크롬 유출로 인해 발생한 법적 분쟁 실화를 다룬 영화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에린 브로코비치는 두 번의 이혼을 겪었고, 보험도 없으며, 일만칠천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는 싱글맘이다. 어떤 해프닝을 거쳐 법률 회사의 사무직으로 취직한 그녀는 우연한 기회로 PG&E의 수상한 동향을 감지한다. 알고 보니 이 회사는 설비의 부식 방지를 위해 인체에 극도로 유해한 중크롬을 사용한 후 폐기물 처리를 엉망으로 한 것. 그 결과 인근 지역 힝클리의 주민들은 오염된 상수원에서 물을 쓰게 되었고 수백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회사는 교묘한 법적 면책 수단을 동원해 이 일을 덮어두려 하고 있었다. 법대 출신도 아니고 법 지식도 거의 없었지만 에린 브로코비치는 집요한 탐문과 증거 확보를 통해 PG&E의 법적인 책임을 증명해 낸다. 이 사건의 책임으로 PG&E가 배상한 총액은 삼억삼천삼백만 달러로, 단일 재판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이다.

           녹록치 않은 삶을 살면서도 약자들의 권리를 찾아주려 분투하는 주인공의 개인적 활약도 그렇지만, 약자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법의 정신을 발견하는 것 역시 인상적이다. 대기업의 파렴치에 치를 떨면서도, 그들과 싸워 이기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다. 극중에서도 에린의 도전이 만류당하는 이유는, 그 일이 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긴 시간과 막대한 돈이 들 수도 있는 소송에서, 대기업을 이길 요량이 비법조인 싱글맘에게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상엔 명분만으로는 부족한 일들도 있는 것이라고, 그게 옳고 네가 열 받는 것도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배워간다. 간혹가다 힘센 사람이 혼날 때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흔한 일이며, 네게도 그런 운이 따라주겠느냐고, 체념을 요구받기도 한다.

           맞다. 힘센 사람들이 자주 혼나고 약한 사람들이 자주 이긴다면 <에린 브로코비치> 같은 영화가 만들어질 일이 있었겠는가. 뉴욕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들, 그것이 영화화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카고 컵스가 우승해주는 것 정도는 돼야 투자자들의 돈을 받아먹을 수 있다(시카고 컵스는 1908년 이후로 지금까지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 하고 있다). 그러니까 ‘PG&E와 힝클리 사건은 사실상 신화 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구팀이 이기고 지는 것과는 달리, 인권의 법적 보호는 법과 정의가 제 구실을 하느냐 못 하느냐를 따지는 문제이다. 뉴욕 양키스가 타당한 절차를 거친다면야, 그 팀의 우승은 아무리 횟수가 많아도 그것이 부조리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동체와 약자의 권리를 짓밟는 대기업의 비윤리적 경영은 반칙이며, 바로 잡혀야 할 일이다. 법에게 시카고 컵스 팬들의 만족을 보호해줄 의무는 없지만, 힘센 사람들의 전횡으로부터 약자들을 보호해줄 의무는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확률의 세계에 살고 있다지만, 가능성이 높은 일만이 절대적으로 두둔되는 사회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한 요즘이다. ”안방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건[1]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학 참사 말이다. 힝클리 사건에 비하면 진행과정에서부터 다른 점이 많지만, 사건 발생의 양상에서 양자는 몇몇 닮은 구석이 있다. 유해검사 과정에서의 은폐, 사건과 본사와의 관련성 부인 등에서 그렇다. 이 사건의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결과만큼은 영화와 꼭 닮아서, 가해 회사에 대한 응당한 제재와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기를,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가 먼 나라, 지나간 과거의 신화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1] "가습기 살균제 피해, 안방에서 발생한 세월호 사건", 노컷뉴스, 16.04.20. (http://www.nocutnews.co.kr/news/458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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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끔찍한 무료함과 무기력함을 동시에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해낼 만한 힘이 도무지 없다고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라마키 하루키를 읽었다. 내가 가진 그의 책 중에선 유일하게 안 읽은 채로 남겨 두었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하루키의 소설은 묘하게 위로를 주는 구석이 있다. 그의 스타일적인 성취와 광활한 문학적 배경과는 상관없는 그런 것인데,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너무너무 울고 싶었다. 기독교 신앙이 없었더라면 나는 문학에서 구원을 찾았겠구나, 싶었던 날이었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에 비하면 무게감이 다소 떨어진다고 평가를 받는 것 같고, 나도 그러한 평에 동의한다. 하지만 예술을 접할 때에는 그것의 객관적인 위치보다 주관적인 체험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이 길고 긴 제목을 가진 소설에서 나는 하루키의 어떤 작품보다도 더 심심한 위로를 받았다.


제목은 길지만, 이에 대한 글을 길게 쓸 힘도 생각도 없다. 내용 요약도 안 할 거고. 그래서 아예 이 책을 두고 글을 쓰지 말까 하다가, 이 책을 읽고서 나에게 일어난 일을 구차하게나마 적어두는 것은, 어떻게든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쓰나 마나 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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