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라는 게 참 묘하다. 시험기간에 죽어라 암기하는 정보들은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휘발해 버리는데(더 비극적인 경우는,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날아가는 것이다.), 잊고 싶어 안달이 나는 기억들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으니 말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우리의 나쁜 기억이 나중에 있을 비슷한 경우의 안 좋은 일을 미리 피할 수 있게끔 도와주기 위해 뇌에서 일부러라도 더 붙잡아두는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마치 액땜이나 백신 같은 역할을 나쁜 기억이 맡아서 한다는 건데, 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역사기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집단의 기억을 정직하게 보존하여 좋은 기억은 모범으로 삼고, 나쁜 기억은 반면교사 삼아서 진일보할 기회를 후대에게 제공하는 것이 역사교육의 한 목표이지 않는가. 역사편찬은 자화자찬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나쁜 기억'이란 없는 것 같다. '나쁜 일에 대한 기억'만 있을 따름이다. 기억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이어서, 좋고 나쁨을 가릴 수 없고 따라서 뇌리에 새겨진 기억을 지우려는 것은 자기 입맛에 맞는 역사를 취사선택(우리는 이것을 역사 왜곡이라 부른다.)하려는 독재자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집단과 개인을 대조할 수는 있어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일인지 모른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 나온 아이디어를 빌리자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은 단선單線적인 것과 양자量子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단선의 관점에서 인생은, 끊어짐 없는 한 가닥의 긴 실과 같아서 앞의 사건과 뒤의 사건이 반드시 이어져 있다. 가령 어릴 때 부모님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불안정한 인격을 갖게 된다-결혼 후에도 불안정한 가정을 가진다-다시 자녀를 학대한다... 와 같이 인과관계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필연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는 알고리즘을 통과하는 항들이 결코 정해진 루트를 벗어날 수 없듯이 인간도 무기력하게 거대한 운동에 휘말리기만 한다. 이 세계는 예측이 가능한 '그래서'의 세계이다.

반면에 양자의 관점에서 인생은, 분필로 그어놓은 선을 자세히 관찰하면 실제로는 점들의 연속에 불과한 것과 같아서, 각 사건들이 반드시 이어져 있지는 않다. 가령 어릴 때 부모님께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불안정한 인격을 갖게 된다-'그러나' 우연찮은 계기로 인격의 변환점을 맞이한다-행복한 결혼생활을 한다-자식을 사랑으로 키운다... 와 같이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우연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서는 지난 날의 상처가 반드시 앞으로의 실패를 불러오거나, 지난 날의 영광이 반드시 앞으로의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예측이 불가능한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이다.


우리가 나쁜(것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자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과거의 흑역사가 끊을 수 없는 족쇄가 되어 현재를 괴롭히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단선적 인생에서는 이 족쇄를 결코 끊을 수 없다. 발사된 총알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양자적 인생은 이 족쇄를 끊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만화가는 지금까지의 컷들의 내용을 모조리 반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컷을 그려넣을 수 있다. 나쁜 기억 지우개는 곧 만화가의 연필이 될 수도 있다. 카카오톡 대화명으로 한 번씩은 꼭 보게 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정신은 바로 양자의 정신이다. 과거가 아무리 구질구질했어도 지금, 당장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나쁜 기억을 지운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미셸 공드리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기억을 없애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면, 어두운 과거를 인정하되, 그것으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갖고 싶다는 건가. 누군가에겐 전자일 수도, 또는 후자일 수도.


무한도전 <나쁜 기억 지우개> 편은 그 출발부터 한계가 있었는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나쁜 기억을 솔직히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번 에피소드는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쁜 기억에 대한 상담은 카메라가 없는 은밀한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몇몇 시민들은 자신의 아픈 기억을 털어놓긴 했지만 방송을 탄 대부분의 시민들은 주로 현재의 고민을 털어놓기만 했다. 따라서 이 특집은 그 제목이나 취지에선 다소 빗나간 분량을 뽑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에서도 의미있는 그림들을 건지기는 했다. 특히 광희가 상담했던, 과거에 따돌림을 겪은 한 시민분이 인상적이었다. 적어도 방송상의 그는, 나쁜 기억 지우개가 필요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기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맨 인 블랙>에서처럼 후레쉬 쏴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은 더 행복해질까. 최소한 트라우마라는 정신병은 많이 없어지겠지. 그런데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 많을까.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기억을 선별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나쁜 기억을 좋아하는 건가 싫어하는 건가. 기억이라는 게 참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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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를 표지만 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을 자기계발서라고 단정했다. 제목도 그렇고 책 디자인도 그렇고 영 께름칙한 게 그동안 손이 잘 안 가던 책이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점도 거부감의 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막상 읽고 나니 이 책은 자기계발서라기보단 심리학, 윤리학, 철학을 아우르는 인문학 서적에 가까워 보였다. 그렇다고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어려운 책인 것도 아니다. 또 자기계발서적인 느낌도 분명히 있는데, 사색만큼이나 실천의 비중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 자기계발서적인 느낌은 아무래도 저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이 책이 다루는 알프레드 아들러라는 심리학자의 사상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책의 서술형식은 아들러 사상을 대변하는 '철학자'와 삶에 불만이 가득한 '청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데, 이러한 방법은 주제를 선명하고 쉽게 전달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트라우마에 대한 부정, 인정욕구에 대한 부정, 칭찬과 야단에 대한 부정 따위의, 상식적인 사실과 반대되는 아들러의 사상을 보다 쉽게, 보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데에 대화의 형식이 큰 역할을 한다. 질문자인 청년의 질문과 의심이 우리의 질문과 의심을 아주 잘 대변해주기 때문에, 철학자의 대답은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과도한 경쟁과 인정욕구(불만)에 지친 사람들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숨가쁘게 살다 보니 정작 본인의 심리상태에 대한 성찰을 못 하는데, 이러한 악순환은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심호흡을 하고, 보다 근원적인 원리를 보게 하는 것이 심리학과 철학의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책에 나오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낸 알렉산드로스의 예는 적절하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 다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마음고생하는 당신은 더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당신은 그저 피해자의 가면을 쓰고서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비겁한 사람일 뿐이다. 나는 부모님 때문에, 친구 때문에, 애인 때문에, 때문에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한 번 따끔히 혼나봐야 한다. 물론 철학자는 결코 청년을 꾸짖지 않는다. 다만 그의 마음에 자리한 욕심과 비겁함을 관망하게 할 뿐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를 야단치는 것은 내 자신이다. 나는 나를 비롯해서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여럿 알고 있다. 그들은 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의 교훈을 받아들이는 것은 쓰라린 일이지만, 동시에 구제의 여지를 발견한다는 기쁨도 얻게 해준다.


'공동체감각'이라는 개념은 아들러 사상의 요체이자 가장 난해한 부분이다. 이 사상이 제안하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황금비율은 다른 사상에선 듣도보도 못한 것이어서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곱씹으며 생각할 수록 탁월한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최소 세 가지 이상의 새로운 개념어를 거론해야 하므로, 그 작업은 이 서평에서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내 나름의 간단한 설명을 붙이겠다.

타인의 인정을 기대하며 이타적 행동을 하는 당신은 실제로는 지독히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타적 행위 그 자체가 아닌 타인의 인정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인정이라는 보상에 연연하는 한, 당신은 결코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없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부자유함은 당신의 행복을 갉아먹을 것이다. 당신은 이제 누군가의 인정=보상을 위한 행위가 아닌, 당신 스스로가 만족할 만 한 행위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결국 세상에 공헌하는 것에서 참된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언제나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무언가 공헌을 하게끔 되어 있다. 여기서 거듭 강조하지만 당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당신뿐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고 말고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자유로운 당신의 결정에 당신만 행복하면 됐다. 이기심과 이타심의 밸런스가 인상적인 이 이론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지만 확실히 흥미롭다.

인정이라는, 외부에서 오는 보상이 아닌 내면적 동기를 강조하는 것은 칸트적이고, 타인의 간섭이 아닌 주체적 판단을 강조하는 것은 니체적이다. 이러한 철학적 깊이가 이 책을 여타 자기계발서와의 차별점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모든 사상이 그러하듯, 이 사상에도 허점은 있다. 어쩌면 이 책의 허점일지도 모르고. 세상만사 모든 일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개인적인 층위로만 한정시키기 때문에, 보다 크고 복잡한 일들에 대해서는 애매한 답을 내리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이 책이 아들러 심리학이야말로 삼라만상의 문제를 푸는 마스터키인 마냥 소개한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구조적인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을 개별적인 차원에서만 보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세상의 모든 일에 아들러를 들이대는 극단적인 사람은 몇 없겠지만, 그래도 논의의 폭이 좁은 것은 사실이다.

또 이론의 바탕이 인간의 이성에 있는 이상, 결국 이 사상은 허무주의에 가닿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에 대한 해결책이 종교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도 아쉽다. 근현대의 학문은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 뭐, 그것은 어쩔 수 없다. 모름지기 학문이라면 이성의 검증만이 유효한 시대이니까. 하지만 그 연구에서 발견되는 허무주의를 얼렁뚱땅 넘기는 것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저 교조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미움받을 용기>의 아들러 심리학에는 대단히 뛰어난 통찰력이 있고, 그 나름 정합적인 모델이 있고,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아이디어를 실생활에 접목시킬 수만 있다면 수많은 현대적 정신병이 고쳐지리라 기대된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뿐이지.


이 책에도 나와 있는 히브리 전통의 교훈인데, 열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중 두 명은 반드시 당신을 좋아하고 한 명은 반드시 당신을 싫어하고 나머지 일곱은 그냥저냥이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고, 그렇다 해서 모두가 당신을 미워하게 되지도 않는다. 미움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본연의 모습을 찾는다는 말과 같을지 모른다. 몇 사람한테 미움 좀 받는다고 인생이 망가지진 않는다. 오히려 미움받지 않으려다 인생이 더 잘 망가진다. 당신은 무엇을 택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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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쉽지 않은 책이다. 성경의 칠할 이상을 차지하는 구약성경이건만, 당최 이 쓸데없이 두꺼운 앞부분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따르는 이들에겐 예수님의 감동적인 교훈과 사역, 그의 죽음과 부활이 있지 않은가. 또 사도들의 명료한 서신서들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밝히 보여주고 있는데, 난해한 구약성경을 붙잡고 씨름을 하느니 더 분명한 신약의 복음들을 연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어쨌든 구약성경은 민족종교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신약성경은 세계종교의 면모를 갖춘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물론 대놓고 구약의 권위를 무시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다룰 책 <에덴에서 새 에덴까지>에도 적혀 있듯이, 기독교인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구약성경을 두고 "어울리지 않는 서문"이라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꽤 될 것이다. 구약성경은 왠지 신학생들이나 배우면 되는 책 같고, 멀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일반적인 신도들에게 있어 구약성경이란 그저 시편과 잠언의 낭만적인 문구나, 욥기의 그 유명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같은 구절을 니스칠한 나무판에 새겨서 집 또는 사업장에 걸어두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책인지 모른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우리가 구속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친근한 신약성경을 더욱 풍성히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신약성경의 저자들, 그리고 예수님도 구약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바탕으로 복음을 완성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려는 이들에게,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약성경은 쉽지 않은 책이다.


한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서구인들에게 부침개와 막걸리를 소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코리안 피자', '라이스 와인' 같은 번역어를 제공하곤 한다. 궁색하긴 하지만 전혀 다른 문화를 누리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개념이라도 전달하려면 이러한 번역은 불가피할 것 같다. 그러나 코리안 피자는 부침개가 아니고 라이스 와인도 막걸리는 아니다. 부침개와 막걸리를 제대로 알려면, 모양과 맛뿐만 아니라 그 음식들이 갖는 서민적인 이미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부침개와 막걸리를 즐겨 찾는 때는 언제인지, 그런 음식들을 먹을 만 한 가게로 떠올리는 곳은 어떠한지, 각각에 어울리는 술과 안주는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 부침개와 막걸리라는 음식들에 대해 알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민족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단순히 문자만 번역하여 문화적 맥락 없이 읽는다면 불충분한 이해에 그치거나 오독을 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성경을 최초로 접했을 독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구약성경의 등장인물들이 가진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구약성경의 개념어들이 갖는 구체적인 의미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코리안 피자와 라이스 와인을 태평양 건너편에서 맛보고선, 그것들을 다 알았노라 만족해서는 영영 그 음식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처럼, 수천 년의 시간과 수천 킬로미터의 공간이 가로막고 있는 문화적 장벽을 넘지 않고서는 구약성경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다. 지금 여기에 사는 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던 일들까지 배워가며 구약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결국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이고, 분명 지금 여기에 사는 나의 신앙에 어마어마한 보탬이 된다. 그런 보탬따윈 필요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까지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약성경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알아가기를 바란다. 이것은 신학생 또는 관심 있는 소수만이 알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값지기 때문이다.


20세기 고고학이 밝혀낸 고대 근동의 정치외교적 문서들은 특히 주목할 만 한데, 이로부터 신학자들은 '언약 개념'이라는 것을 도출해 내었다. 이 언약 개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선택된 백성들과 약속을 맺으실 때, 이 약속에 어떠한 문학적 양식이 갖춰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믿는 이에게 어떠한 외경심과 은혜를 경험하게 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해석에는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지 않다. 성경말씀을 특정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성취와 결부시키는 것은 결국 성경을 '그들만의 이야기'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인 샌드라 리히터는 하나님의 언약이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전세계로 확대되는 도식을 제공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것은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 너머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이해와 결론을 공유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 전제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쉬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이 전제를 받아들이고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성경을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더 잘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될 것이다. 과연 철학은 무전제의 학문이요, 신학은 전제의 학문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성경에 대한 지성적 탐구는 지적 유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이 왜 우리에게 복이 되는지 아는 것이 제일로 중요하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미신적이고 자기편의적인 부분을 도려내어준다. 지금의 기독교는 지나치게 성경에 매여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제멋대로인 게 문제다. 성경이 본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그에 따른 실천을 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기독교적인 기독교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에덴에서 새 에덴까지>는 그 여정에 분명히 큰 도움이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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