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선생의 2010년작 <내 젊은 날의 숲>을 읽었다. 이 소설은 그의 작품으로선 흔치 않게 여성을 화자로 삼고 있으며, 시대적 배경도 현대이므로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또다른 맛을 볼 수 있다. 세밀화를 그리는 주인공이 부모와 자식 관계, 삶과 죽음에 대해 끝없이 생각하고, 각 주제가 소설 전반에 걸쳐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줄거리에 뚜렷한 기승전결이 있음에도 관념적인 색채가 짙은 것은 역시 김훈 선생만의 스타일이다.


제목에 숲이 들어간 만큼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로 전방 민통선 내에 있는 수목원에 일년 계약직으로 취직하게 된다. 이 수목원-숲에서 주인공이 맡은 일은 수목원 내의 갖가지 식물들을 세밀화로 그리는 건데, 이 그림들은 추후 기록보존을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씨를 흩뿌려 세상에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식물은 그 유전적 일치에도 불구하고 부모자식의 연을 맺지 않는다. 설령 바로 곁에서 자라날지라도 이 식물들은 서로를 부모 내지는 자식이라 여기지 않는다(고 인간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포유류의 저주를 타고난 인간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모자식 간의 연에서 자유롭기가 힘들다. 공무원이었다가, 현재는 비리로 징역을 살고 있는 아버지와 이로 인해 반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싶어 숲으로 들어간 주인공이지만, 일개 피조물로서 제 종種의 저주를 거역하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생과 사에 대한 테마도 끝없이 변주된다. 한국전쟁 당시 고지전이 치열했던 자등령은, 바로 예의 수목원이 위치한 곳이다. 그 치열했던 고지전에서 남북 모두 큰 사상자를 냈고, 소설의 현재시점에선 당시 사망하고 그 자리에 방치된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 중에 있다. 주인공은 이 발굴현장 스케치를 군에게 의뢰받으며 죽음을 관찰하고, 고찰한다. 이미 죽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몇몇 산 사람들도 죽음을 맞이하는데, 전방위적으로 닥치는 죽음들은 소설을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안내한다.

또 하나, 나무의 생사를 소개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수명樹命이 늘 수록 줄기 안쪽과 바깥쪽에 생사가 공존하는 나무의 생장은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인데, 포유류의 신세를 버거워하는 주인공에게 나무의 생사, 식물의 생식이 갖는 종적 특성은 기이한 동경을 불러 일으킨다. 


이토록 무거운 주제들이 전개되다 보니, 자연히 소설의 분위기도 무겁다. 그전에 김훈 선생의 소설치고 밝은 분위기의 것이 있기는 했던가. 일견 허무주의적 테이스트를 풍기기도 하지만, 결코 허무주의 그 자체가 소설의 지향점은 아니다. 그의 소설에선 의외의 낙관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소설에서도 그랬다.


김훈 선생 글의 매력이라면 아무래도 특유의 간결한 문체가 꼽힐 것이다. 건조하고 남성적이며, 시니컬한 문체. 하도 간결하다 보니 산문보다는 운문에 가까워 보일 때도 있는 그 문체. 하지만 이 소설에선 화자가 젊은 여성이어서 그런지 그의 대표작들에 비해 문장이 훨씬 수다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여성의 것치고는 문장이 딱딱한 편이지만, 이정도만 되어도 선생의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긴 호흡의 글들이 많다. 하여, <칼의 노래> 같은 작품과 비교해서 읽어봐도 상당히 재밌는 독서가 될 것이다.


앞서 내가 이 소설에서 낙관을 읽었다고 적었다. 따지고 보면 소설에서 밝은 느낌을 주는 분량이 전체의 백 분의 일이나 될까 싶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태도와 결론이다. 작가의 말에서 선생은, '사랑과 희망이라는 말의 사용이, 도리어 그것의 부재를 드러낼까 두려웠다'고 했다. 그러면서 본인의 여생에는 '더 많이 사랑과 희망을 얘기하길 소망한다'며 글을 마친다.

이 책이 쓰여진 2010년 이후로 세상은 더 많은 사랑과 희망을 얘기함직 해졌을까. 요즘 범람하는 신조어들을 보면 영 아닌 것 같다. 소설가 한 명이, 소설 한 편이, 독자 한 명이 소망한다 해서 바뀔 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하진 않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망한다. 사랑과 희망이라는 말이, 그것의 부재가 아닌 충만함을 드러내는 날이 오늘보단 내일에 더 가깝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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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한도전은 웃기다. 지난 십년 동안 무한도전이 우리에게 준 웃음을 질량으로 환산할 수 있다면 그 거대한 질량 덩어리의 중력은 틀림없이 끈끈할 것이다. 지난 세월 무한도전은 대한민국의 광대 노릇을 누구보다 잘 해내었다. 그런데 요즘 광대짓 말고도 무한도전이 집적거리는 영역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바로 무당이다. 무당의 다양한 역할 중에서도 억울한 넋을 위로하는 씻김굿판의 무당 말이다.


2. 이 심상찮은 변화의 조짐은 <바보 전쟁>에서부터 느껴졌다. 어쩌면 더 이전부터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확실히 감지한 것은 <바보 전쟁>에서부터였다. 아시다시피 <바보 전쟁>은 <2015 무한도전 특별기획전> 편에서 하하와 광희의 아이디어로 제작된 에피소드다. 아마 태곳적의 코미디언들도 웃음의 소스로 삼았을 바보. 이 식상한 바보 코드로 무얼 어떻게 만들지 기대보단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해당 에피소드는 적어도 내겐 제법 재밌었고, 심형탁과 솔비 같이 그간 예능에서 조명받지 못했거나 활동이 뜸했던 사람들에게 대중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의의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더 감명을 받은 부분은 다름아닌 '바보 어벤저스' 멤버들의 흑역사 청산이었다. 간미연의 'lose' 사건, 말이 필요없는 솔비, 과거에 상처가 있었던 심형탁 등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이 다소 모자랐을 뿐인 뇌순남녀의 담담한 고백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들이 집단적으로 같은 옷을 맞춰 입고 한 곳에 모여 앉아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얘기하고, 용서하는 모습을 보라. 영락없는 심리치유센터의 현장이 아닌가. 이후 김구라와 전현무를 초청해 벌인 지식대결은 이 심리치유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한맺힌 넋에 대한 제물이었다.


3. 한편 <못.친.소 2>를 보자. 이미 사년 전에 활용했던 소재의 재활용. 나는 이 기획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 아이템이 재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던가? 외모비하에 대한 불쾌함은 둘째 치고, 저번 시즌의 멤버들과 겹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웃음을 뽑아낼 수 있는 연예인들이 남아 있기나 한 건지, 또 같은 컨셉을 갖고 어떻게 웃기려는 건지, 이 기획이 태작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바보 전쟁>과 달리, 이번 에피소드는 고압의 바람을 맞는 초고속 영상 정도를 제외하면 삼부작이나 한 것 치고 재미가 거의 없었다. 내성이 단단히 든 것이다. 내가 외모로 뭘 어쩌려는 특집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번 에피소드는 꼼짝없이 노잼 편으로만 남을 성 싶었다.

근데 에피소드의 말미에서 무한도전이 또 굿판을 벌이고야 말았다. 시즌 2 최고의 매력남을 차지한 우현의 소감과 하상욱 시인의 멘트가 이 자칭 페스티벌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한때는 자신의 외모를 비하했던 사람이 이제는 당당히 매스 미디어에서 자신의 외모를 비호庇護한다. 세련된 도시적 이미지의 시인이 자신의 민낯과 허당끼를 내놓으며 하는 말이, '마치 휴가를 즐긴 것 같다'고 했다. 반짝반짝 이쁜 것들이 옳은 이 시대에 '못생길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이 못.친들의 잔치는 그 종반부에서 시원한 한풀이를 쏟아낸다.


4. 두 에피소드는 각각 어떠한 열등함을 내세우고, 이 테마에 어울리는 사람들을 그러모아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놓음으로써 웃음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 기획의 결과는 모두 웃음보다는 치유의 임팩트가 더 컸으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 길이 남을 재미를 뽑아내진 못 했다. 특히 웃음에 있어서만큼은 <못.친.소 2>는 나에겐 실패했다.

또 <바보 전쟁>에선 맞춤법과 수도 맞추기 문제 같은, 바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문제로 사람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리고 <못.친.소 2>에선 변진섭이나 바비 같은, 저 사람들이 못생긴 거면 도대체 세상에서 안 못생긴 사람은 몇이나 되는 걸까, 싶은 외모의 게스트를 초청하는 무리수를 보였다. 뭐, 이런 우기기야 이미 저번 시즌에서도 보여준 적이 있긴 하다. 무엇보다 고압의 바람을 정통으로 맞아서 잘생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두 에피소드 모두 시청자들이 출연자의 지적 수준이나 외모를 보며 웃긴 웃는데, 양 특집에서 제시한 '바보스러움'과 '못생김'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정작 얼마 안 된다는 씁쓸한 특징을 갖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뇌순남'과 '못.친'의 자격을 당당히 갖췄다.


5. 이번에 다룬 에피소드들엔 잡다한 단점들이 많고, 웃음의 무게가 다른 편만 못 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이제 더이상 익살만 넘치는 광대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너무 똑똑하고 너무 잘생긴 이 세상에서, '그래 나 하나쯤은 멍청하고 못생겨도 되잖아'라며 위로해주는 심리치료사, 내지는 그동안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 노릇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 하는 모양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멍청하고 못생길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확실히 휴가처럼 느껴질 것 같다.

주말 저녁 황금시간대에, 그것도 오락 프로그램이 이런 투잡을 뛰어도 되는 걸까. 뭐, 무한도전은 그동안 종종 웃음보단 감동을 더 많이 주곤 했다. 무엇보다 무한도전이 투잡을 뛰든 쓰리잡을 뛰든 이것은 매스 미디어이고, 매스(대중)의 정당한 지지를 받는 한, 무한도전의 이런저런 역할이 문제될 일은 그다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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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0

나의 글/일기 2016. 2. 20. 20:00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 중 하나는 무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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