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리뷰/영화 2016. 2. 18. 19:50

수난은 구원 여정을 그리는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소재이다. 진창을 헤매지 않고서야 구원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까.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이미 남편을 여읜 채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배우자의 상실, 이미 충분히 그녀는 고달프다. 그녀에겐 이제 외동아들뿐이다. 그러나 그 아들마저 유괴되어 목숨을 잃는다. 창세기 후반부의 등장인물 야곱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나중에 찾게 되지만), 자신도 저세상으로 따라가겠노라 말했다. 신애도 그녀 인생의 모든 활력을 잃어 버린다.


그때 그녀는 어떤 계기로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녀의 영혼은 구원을 맛보게 된다. 그녀의 활짝 웃는 얼굴이 타이트하게 잡히는 쇼트는,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아들을 여읜 후에야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티없는 웃음이 당혹스럽다. 물론 그녀가 마음의 평화를 얻고 그 질곡에서 헤어나온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러닝타임은 한참 남아있다.


새 삶을 누리는 신애는 아무래도 유괴범의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고민 끝에 그녀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한다. 그냥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대면하여 용서하리라 마음 먹은 신애는 교도소에 면회를 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유괴범도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알아버린 게 아닌가. 더없이 평안한 얼굴로 자신의 죄사함 받음을 고백하는 유괴범을 보고 내면의 어떤 끈이 끊어져 버린 신애.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막에 접어들게 된다.


용서가 폭력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이미 나쁜 놈이 용서를 받았다. 이게 무슨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창자가 뒤틀리고 삶의 모든 것이 주저앉는 고통 가운데에서 피해자만 등신 같이 휘둘리고 있다. 신애에게 있어 신은 이 사달의 공범, 아니 주범이다. 그런 신에 대한 악다구니가 정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울분의 표현을 단지 객기로 치부하는 것은 용렬한 일이다.


<밀양>은 비유와 암시로 가득 차 있다. 제목인 밀양密陽을 secret sunshine-비밀의 햇볕으로 번역하는 것부터 해서(경남 밀양의 密은 '비밀하다'가 아닌 '빽빽하다'는 뜻이다.), 대사와 연기, 상황에서의 의도적인 터치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때로는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이지만, 이창동 감독은 이미 전작들에서도 그러한 표현을 즐겨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어떤 장면들은 소름끼치게 사실적인데, 특히 기독교와 관련된 장면들은 다른 영화들이 꿈도 꾸지 못할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 삽입된 예배 장면들은 실제 예배실황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데, 이것이 극영화에서 가능한 일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주인공 신애 역을 맡은 전도연은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그녀의 옅은 메이크업과 깡마른 몸은 영화의 삭막한 분위기를 내내 유지시켜주고, 그녀의 연기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어떤 말보다도 절절히 표현해 낸다. 더불어 신애를 짝사랑하는 종찬 역의 송강호 역시 커리어 최고 수준의 연기를 펼치는데, 전도연만큼 화려한 개인기를 보여주기 힘든 역할임에도 그 존재감만큼은 결코 그녀에게 밀리지 않는다. 종찬은 이 극의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주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자, 신애를 좋아한다는 것 외에는 이 이야기에서 항상 한 발자국씩 떨어져 있는 관찰자이다. 그로 인해 이 영화의 톤은 비슷한 장르의 다른 영화들과 뚜렷한 차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밀양>은 한동안 전도연을 '칸의 여왕'의 자리에 앉혀준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멋진 일이다. 유럽 삼대 영화제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다는 칸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받았다는 것은 영화계를 넘어서 나라의 경사로 여겨질 만하다. 하지만 여우주연상이라는 찬란한 타이틀이 영화를 가릴 때도 있지 않나 싶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은 연기상은 연출자의 몫이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그만큼 연기라는 것은 연기자 일신의 힘만으로 일구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일 테다. 연출과 각본이 좋은 연기를 만들 수는 있어도, 연기가 좋은 연출과 이야기를 유도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아무리 연기력에 만렙을 찍은 배우라도 지뢰 같은 작품을 만나 그(녀)의 경력에 먹칠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본다.  그렇지만 나는 전도연이 과대평가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갈채받아 마땅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다만 그녀의 탁월한 연기와 함께 이 영화가 제공하는 풍부한 영화적 체험들을 '칸의 여왕' 수식어에 홀려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군소리가 길었다.


극중 신애는 '햇빛에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여집사의 말에 '이 빛에 무슨 뜻이 있느냐고, 여기엔 아무 것도 없다'며 냉소적인 대답을 한다. 하지만 여기는 밀양이다. 온갖 비밀한 뜻이 햇볕 속에 감추인 곳. 영화의 마지막 장면, 빽빽하게 내리쬐는 볕이 무거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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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급 살인

리뷰/영화 2016. 2. 17. 20:31

헨리 영은 열살 때 고아가 되었다. 어린 헨리 영은 여동생과 본인의 생계를 위해 5달러를 훔치다가 절도죄로 체포되어 지방 교도소에 수감되고, 그의 여동생은 그가 체포된 후에 보호시설로 보내졌다. 비슷한 시기, 샌프란시스코 연안에 위치한 알카트라즈 섬에 교도소가 지어진다. 이 교도소는 알 카포네, 머신건 켈리 같은 희대의 범죄자들을 수용하던 곳으로, 수감자의 명성만큼이나 강력한 교정능력으로 유명했다. 알카트라즈는 효율성 문제를 위해 강력범죄자가 아닌 경범죄자들도 수용하게 되었고, 그때 보충-이감된 사람 중에 헨리 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잡범이었던 헨리 영은, 그러나, 이 악명 높은 교도소에서 탈옥을 시도한다. 그 결과 함께 탈옥을 시도한 사람들은 사살되었고, 헨리 영은 생포되었다. 탈옥의 죄과는 무거웠다. 헨리 영은 3년에 걸친 독방형에 처해졌고, 이 과정에서 그의 심신은 상당히 미약해졌다. 독방에서 나와 다른 수인囚人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첫날, 헨리 영은 자신의 탈옥을 밀고한 죄수를 숟가락으로 죽였다. 그의 숟가락은 밀고자의 목에 있는 경동맥을 정확히 끊어 놓았다. 이제 헨리 영은 탈옥에 이어 이백여 명의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인도 저질렀다. 그는 일급 살인죄로 고소되었고, 사형을 확정적으로 받은 처지에 놓였다. 여기까지가 재판을 앞둔 헨리 영의 과거사 내지는 공소사실이다.


절도-탈옥-살인의 확증적인 범죄. 게다가 이 세 사건은 모두 현행범으로서 체포된 것이다. 재판이라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 사건의 변호인을 신출내기 변호사인 제임스 스탬필이 맡게 된다. 아마 그의 법률사무소에서는 일종의 경험으로서 이 사건을 맡겼을 테지만, 그 덕분에 이 재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일급 살인>은 재판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법정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은 피고 헨리 영과 그의 변호인 제임스 스템필의 면회 장면에 몰려 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알카트라즈의 비인간적인 시스템도 강조하고 있지만, 두 주인공의 인간적인 교류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법정 장면들이 빈약한 것도 아니다. 검사 역을 맡은 윌리엄 H. 메이시는 심약한 평소 이미지와는 다른 냉철한 연기를 보여주고, 알카트라즈의 부소장 역을 맡은 게리 올드만의 폭발적인 연기가 발휘되는 곳도 법정 안이다. 변호인 역의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판사와 배심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롱테이크 장면에서나, 증인과 대질심문을 하는 장면에서는 괄목하게 만드는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떠받치는 이는 단연 피고, 헨리 영 역의 케빈 베이컨이다. 그는 교도소의 잔인한 학대로 인해 정신병을 앓는 죄수의 역할을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완벽하게 소화한다. 알카트라즈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데에 장황한 내레이션이나 역사적 설명은 필요 없다. 케빈 베이컨이 분한 헨리 영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의 잔혹함을 알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헨리 영은 이 재판에서, 또 관객들에게 알카트라즈를 고발하는 가장 강력한 증인이자 증거가 된다. 이는 전적으로 케빈 베이컨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테크닉적으로는 현란한 카메라워크를 동반한 롱테이크가 돋보인다. 앞서 말한 제임스 스탬필의 연설 장면이나 스탬필과 영의 면회 장면에서 몇 번이고 롱테이크가 활용되면서, 우리는 이 중요한 대화들을 숨죽이고 보게 된다.


단돈 5달러로 인해 인생을 잃어버릴 정도로 무자비한 사회. 그 야만적인 사회를 직시하게 하는 이성의 법정. 친구를 원하는 피고와 정의를 원하는 변호인의 기묘한 우정이 형성되는 면회실. 그리고 사회의 안정과 죄수의 교정을 이유삼아 악랄한 학대가 자행되는 교도소. 진정 이 세상은 눈 두기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어둡고 후미진 곳에 더 많은 눈이 향하게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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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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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서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예수는 기독교의 정경인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연구, TV 다큐멘터리, 소설, 인터넷 페이지 등에서 무수히 다루어지는 주제이고, 이러한 자료들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두루두루에게 보급되고 있다. 도마복음, 마리아복음 따위의 '대안 복음서들'의 신뢰성 문제, 필사된 성경의 조작 가능성(혹은 필사 상의 실수가 있었을 가능성),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른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 같은 만만치 않은 주제들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전통적 예수상을 뒤흔들고 있다. 그 결과 성경이 나타내고 역사 속에 실재했던 예수는, 비기독교인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인에게조차도 상당히 왜곡된 모습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미국의 목회자이자 저술가인 리 스트로벨은 이렇게 왜곡된 예수의 모습을 낳는 주요한 의혹들을 정리하고, 이 문제들에 정통한 학자들의 도움을 힘입어 진상을 철저히 파헤친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자는 회의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진영에서 나오고 있는 질문들을 종합하여 전통적 예수상을 지지하는 학자들을 심문한다. 저널리스트 경력을 십분 발휘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엄밀하고 합리적인 질문들을 쏟아내는데, 이 방법론은 무척 신뢰감을 준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교회에서 믿고 있는 예수는 과연 진짜 예수인가? 이 질문의 대답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저자는 더더욱 물러섬 없이 질문한다. 질문과 답변의 공방 속에, 저자는 성경과 교회의 예수가 곧 참된 예수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제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로, 성경의 예수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이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예수라는 인물은 실재했을지 모르지만 성경에서 제시하는 온갖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바로 그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논증을 거쳐서 성경 속의 예수가 실제적인 예수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물론 사진도 영상도 녹음기록도 없었던 시대의 인물을 조감하는 일이 한치의 의심 없이 실증적일 수는 없다. 우리에겐 다만 개연적인 증거들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개연성은 매우 강력하며, 다른 모습의 예수를 논증하려는 시도들은 보다 모순적이고 빈약한 논리 위에 서 있음이 드러날 뿐이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교회에서 믿는 예수의 모습에 견줄 만한 대안을 찾는 일이란 여간해선 쉽지 않아 보인다.


이렇게 든든한 기반 위에 있는 예수의 초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왜곡된 예수의 모습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은가? 우선 교회가 총체적인 무지에 빠진 까닭이 크다. 맥락 없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섬기기에도 급급한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런저런 의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죄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는데, 책의 결론부에 나와 있듯이 "예수를 인간과 같은 수준에 놓으려는 것"이야말로 의혹의 원인이고 불신앙의 까닭이다. 예수를 끌어내리려는 것이든, 내가 그만큼 높아지려는 것이든 간에, 결과는 참된 예수를 거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나 역시 한때 종교철학을 공부하며 심각한 회의주의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것 역시 예수를 인간적인 수준에서만 이해하려고 했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을 직시하려는 진실한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결과는 참된 예수가 오직 한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논증이 믿음이라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 한다. 믿음이 이성에 의해 공격 받거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이성에 의해 세워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파스칼도 이와 비슷한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지식을 알아갈수록 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구하는 적용이 필요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에도 인용되어 있는 인상적인 금언으로 글을 마친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지만,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존 스토트의 말이다.

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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