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따뚜이

리뷰/영화 2019. 12. 18. 03:58

<라따뚜이>는 그 누구보다 발달한 미각과 후각, 그리고 천재적인 요리센스를 지닌 쥐, 레미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천재성이란 다분히 인간의 기준에 맞춘 것이다. 쥐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만큼 예민한 미각을 지니지 않은 데다가 인간과 같은 미각을 요구받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레미는 겉모습은 인간의 모양을 갖추고 있으나 그 속에 있는 재능과 욕망은 인간의 그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기야, 진정한 의미에서 쥐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인간이 만들 수는 없을 테니,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만은. 하여간 레미는 인간의 심미적인 감각과 창조적인 능력을 동경하며 요리라는 행위에 대한 존중심을 보인다. 심지어 그는 위생적인 요리와 식사를 위해 직립보행을 한다. 그래야 두 손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요리를 좋아하고 잘 하는 레미에게 큰 비극이 있으니, 바로 그가 쥐라는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레미를 제외한 그 어떤 쥐도 요리라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은 쥐의 천적인데, 천적이 하는 일을 동경하며 관심가지는 것 자체가 사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레미는 이런저런 우연과 자신의 기지를 통해 기어코 요리를 해내고 만다. 쥐에 대한 인간의 혐오, 인간에 대한 쥐의 공포, 그 상황에서 요리를 하는 주인공 쥐. 이 요소 자체가 벌써 훌륭한 서스펜스의 재료가 된다.

이 영화의 교훈은 명백하다. 그것은 레미가 존경하는 요리사 구스토의 격언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가 시사하는 바, 겉모습과 출신으로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레미는 작중 등장하는 그 어떤 요리사 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그가 흠모하는 구스토 보다도 큰 재능을 지녔을지 모른다. 또한 레미는 요리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존중심을 지니는 쥐로서, 요리사로서의 위생 역시 각별히 신경쓴다. 그럼에도 레미에게 요리는 금지된 영역이다. 그가 쥐이기에 그렇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도, 아무리 청결에 대한 의식을 갖춰도 쥐는 주방에서 미움만 받을 뿐이다. 재능이나 열정, 실력이 아닌 겉모습으로 인해 자신의 자질을 쉽게 펼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많다. 우리는 흑인, 여성, 이민자 등이 외모와 출신 때문에 차별받고 좌절하나 끝내는 극복하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라따뚜이> 역시 (판타지가 많이 가미되기는 했지만) 그 이야기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마침내 발견한 자의 여정이 주는 감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쥐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이며, 쥐가 먹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쥐는 시궁창에서 인간이 먹다 버린 음식을 파먹으며 산다. 쥐는 이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제기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안다. 레미가 있어야 할 곳은 주방이며, 레미가 해야 할 일은 요리라는 것을. 그것은 일종의 고향과도 같은 것이다. 나의 근원이자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향. 레미가 진정 특별한 이유는 그 누구보다 요리를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보수적인 생각일 수 있음을 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해야 한다.'라는 말 자체가 폭력이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레미는 요리를 '하고 싶은' 것이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어찌 쉽게 결론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 레미는 요리를 해야 하는 존재인 듯 보인다. 적어도 이 이야기를 만든 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고 싶다', '잘 한다', '해야 한다'는 모두 다른 층위의 문제이며 이것을 한 번에 엮어버릴 경우 인생의 경로설정 혹은 인생관 자체가 불건전해질 수 있음에 우리는 언제나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이러한 주제 너머에 숨어 있는 '왜?'라는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결국 이 영화는 한 마리 쥐의 일생이 아닌 우리 인간들의 일생을 논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왜 무언가를 하고 싶으며, 왜 무언가를 잘 하며, 왜 무언가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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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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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나의 글/긴 글 2017. 6. 13. 08:50

01

이 주제는 우리 인생의 (거의)모든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이를 다루기가 꺼려진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기가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그 표현수단이 글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상관없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의 (거의)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주제, 사랑에 대해 무언가 말하는 일은 난감하다. 그 어떤 주제보다 사랑을 얘기할 때 구태의연해 지기 마련인데, 나까지 굳이 이 세상에 이미 차고 넘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보탤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내가 어떤 내용을 적더라도 그것은 상투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첫째로는 나의 짧은 식견과 비루한 글솜씨 때문이고, 둘째로는—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인데, 이보다 참신하기 어려운 주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에 대해 무언가 주절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 역시 나의 (거의)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만하면 이 수준 낮은 글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생은 결국 맹목에 수긍한다. 맹목이라는 말 그대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눈먼 사람의 여행과 같다. 그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사람은 그저 태어났기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왜 사냐는 질문에 우리는 멋쩍은 웃음을 짓거나 불쾌한 감정을 가진다. 그 질문은 다분히 비일상적인 것으로서,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뉘앙스를 지닐 때가 많다. 이 질문이 도발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다 할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근원과 목적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다급한 문제도 아닐 뿐더러,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것은 우리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질문이다.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가장 작은 행성은 무엇인가, 같이 아무래도 좋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먹고 살기에 급급한 사람에게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이 안드로메다의 문제와 매한가지로 무용한 것밖에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삶의 의미에 비하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분명한 어조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당연한 소리! 사랑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문제는 우리가 사랑을 원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가이다. 나는 사랑을 맹목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인생처럼 눈먼 사람의 까닭모를 여정과 닮아 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이유를 댈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가 잘생겨서 좋아', '나는 너가 재밌어서 좋아'라는 말은 일견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사랑이 조건에 근거함을 의미한다. 즉, 그 조건을 충족할 때에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물론 조건과 이유가 완전히 배제된 사랑이 존재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조건은 최소한일 수록, 막연할 수록 좋다. 달리 말하면, 맹목적일 수록 좋다.

만약 어떤 사랑에 조건이 줄줄이 달려 있다면 그 사랑은 어찌 보일까. 이를테면 '나는 너가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재밌고, 돈도 잘벌고, 키도 크고, 학벌도 좋고, 부모님도 좋은 분이셔서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이 있다고 하자. 반면에 '나는 너가 못생기고, 운동도 못하고, 재미없고, 돈도 못벌고, 키도 작고, 학벌도 안 좋고, 부모님도 개차반이지만 너를 사랑해'라는 고백은 어떠한가. 두 사랑고백 중에서 어떤 것에 더 진정성이 실려 있는 것 같은가. 우리는 누구나 맹목적인 사랑을 원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맹목적인 사랑을 줄 만한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어떤 시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조건적인 사랑을 사고 판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유용한 방법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받을 수도 없는 우리에게 이런 시장마저 없다면, 우리는 영영 사랑받지 못할 지도 모른다. 완벽주의에 집착하면 피곤해 지는 법. 한계는 뛰어넘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라고 존재하는 것이지 않는가(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배우며 자란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안엔 달래지지 않는 욕망이 있다. 우리는 조건적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한다. 이 서글픈 이기심은 우리가 받는 상처의 주된 원인이다. 우리는 맹목적인 사랑이 꿈같은 이야기인 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 꿈이 외면을 당할 때에는 속쓰림에 잠 못 이루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CCM이 비웃음거리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이 욕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이 노래는 태어남의 의미를 사랑과 결부시키고자 한다. 삶의 이유가 사랑받음에 있다고 노래하는 이 천진난만함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안다. 그런 의미라면 애초에 성가로 불려질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 노래는 어쩌면 진실에 매우 가까울지도 모른다. 낭만의 안개를 걷고 생각하더라도, 우리가 조건을 따르지 않는 사랑을 받을 때에 인생 최대의 충만함을 경험한다는 주장이 그렇게 과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CCM뿐 아니라 대중가요의 사랑 역시 조건을 달지 않거나 최소한에 그친다. 조건적 사랑을 자랑하는 노래가 보편적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여튼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구는 맹목의 사랑을 지향한다. 이 욕구가 충족될 수록—우리가 받는 사랑이 눈먼 것일 수록, 우리의 삶은 충만해 지고 생생해 질 것이다. 논리의 비약을 한 번 더 감행하자면, 이 사랑받음이 진실될 수록 우리 인생의 진실성 역시 담보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진술이 참에 가까운 것은 아닐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 한켠에서 사랑을 받으려 서성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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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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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입니다

리뷰/영화 2017. 6. 5. 11:57

그 존재만으로 현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그러한 일은 대체로 연예인들의 몫이다. 엔터테이너라는 직업이 워낙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택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들을 소비시켜야만 돈을 만지는 매니지먼트 회사나 언론사들의 노련한 전략도 이에 한몫 할 것이다. 연예인에, 드라마에, 영화에 현상이니 신드롬이니 하는 수식어를 붙이는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연예인에 비하면 흔치는 않지만, 정치인이 현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정치인이 어떤 현상이 된다는 것은 연예인의 그것에 비해 훨씬 복잡한 요소를 동반한다. 근본적으로 인기(포퓰러리티)를 지향하는 연예인과는 달리, 정치인의 포퓰러리티는 포퓰리즘과 동일시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popular와 people이 같은 어원을 가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는 사람들(그것도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에는 지극히 경계를 한다. 다수결은 가장 공정한 원리인 것 같지만, 그 다수의 선택이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수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정당성을 얻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충동에 휘둘리는 정치가 잘못된 만큼, 다수를 설득하지 않는 정치 역시 잘못됐다. 현대정치의 역사는 포퓰리즘과 독재의 양극단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던 기록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선거, 현상이 되었던 한 남자가 나타난다. 지난 세기 그의 선거 이력은 실패로 점철되어 있었다.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그마저도 한 번은 보궐선거였다)에서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총 네 번의 낙선을 맛본 사람 노무현. 특히 그의 20세기 마지막 선거였던 제16대 총선(2000년)은 그야말로 참담한 패배였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 불과 2년 후에 그는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 영화는 그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인 민주당 경선과정을 당시 선거캠프 참모들과 노사모 회원들의 증언으로 엮어내고 있다.

한 정당의 경선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라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기획일 것만 같은데도, <노무현입니다>는 전혀 따분하지 않다. 오히려 웬만한 극영화보다 극적인 에너지로 충만하다. 이 영화는 현상이 된 한 정치인에 관한 것이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사람은 주변에 어떤 식으로든(심지어 관객에게도) 에너지를 불어넣기 마련이다. 노무현과 그에게 심취한 사람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릴 만한 에너지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로 인해 이 땅에 패인 자국이 어떤 것인지는, 앞으로 두고두고 평가받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노무현입니다>는 폭발적인 정치인의 폭발적인 팬클럽과, 그들 생애 가장 폭발적인 순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 영화의 부글거리는 에너지는 관객을 따분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어떤 정치인이든 간에, 그를 순교자나 교주로 만드는 일은 썩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정치에 종교심이 개입되는 순간부터 그 양상은 아주 고약해 지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순교자가 아니며 교주는 더욱이 아니다(누구보다 본인이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에너지가 얼마나 강력한 것이든 간에, 우리는 노무현과 그를 둘러싼 정치적 일족의 공과功過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얼마 전에 경험했던 정치적 비극을, 그 반대 진영에서 다시 한 번 경험할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도 노무현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은 맞다.

그러나 연예인이나 친구라면 사정은 좀 더 넉넉해 진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연예인과 친구에게 엄격하고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래서는 안 되기도 하고. 노무현은 정치인이지만 이 영화는 그를 연예인 내지는 친구 보듯이 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좋은 정치영화의 자격을 상실한다. 그럴지언정, 차라리 이 영화는 팬레터 또는 우정의 헌정시가 되려 한다. 그들이 그러고자 한다면야, 그것에까지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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