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따뚜이
<라따뚜이>는 그 누구보다 발달한 미각과 후각, 그리고 천재적인 요리센스를 지닌 쥐, 레미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천재성이란 다분히 인간의 기준에 맞춘 것이다. 쥐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만큼 예민한 미각을 지니지 않은 데다가 인간과 같은 미각을 요구받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레미는 겉모습은 인간의 모양을 갖추고 있으나 그 속에 있는 재능과 욕망은 인간의 그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기야, 진정한 의미에서 쥐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인간이 만들 수는 없을 테니,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만은. 하여간 레미는 인간의 심미적인 감각과 창조적인 능력을 동경하며 요리라는 행위에 대한 존중심을 보인다. 심지어 그는 위생적인 요리와 식사를 위해 직립보행을 한다. 그래야 두 손이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요리를 좋아하고 잘 하는 레미에게 큰 비극이 있으니, 바로 그가 쥐라는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레미를 제외한 그 어떤 쥐도 요리라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은 쥐의 천적인데, 천적이 하는 일을 동경하며 관심가지는 것 자체가 사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레미는 이런저런 우연과 자신의 기지를 통해 기어코 요리를 해내고 만다. 쥐에 대한 인간의 혐오, 인간에 대한 쥐의 공포, 그 상황에서 요리를 하는 주인공 쥐. 이 요소 자체가 벌써 훌륭한 서스펜스의 재료가 된다.
이 영화의 교훈은 명백하다. 그것은 레미가 존경하는 요리사 구스토의 격언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가 시사하는 바, 겉모습과 출신으로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레미는 작중 등장하는 그 어떤 요리사 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그가 흠모하는 구스토 보다도 큰 재능을 지녔을지 모른다. 또한 레미는 요리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존중심을 지니는 쥐로서, 요리사로서의 위생 역시 각별히 신경쓴다. 그럼에도 레미에게 요리는 금지된 영역이다. 그가 쥐이기에 그렇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도, 아무리 청결에 대한 의식을 갖춰도 쥐는 주방에서 미움만 받을 뿐이다. 재능이나 열정, 실력이 아닌 겉모습으로 인해 자신의 자질을 쉽게 펼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많다. 우리는 흑인, 여성, 이민자 등이 외모와 출신 때문에 차별받고 좌절하나 끝내는 극복하는 이야기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라따뚜이> 역시 (판타지가 많이 가미되기는 했지만) 그 이야기들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마침내 발견한 자의 여정이 주는 감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쥐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이며, 쥐가 먹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쥐는 시궁창에서 인간이 먹다 버린 음식을 파먹으며 산다. 쥐는 이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제기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안다. 레미가 있어야 할 곳은 주방이며, 레미가 해야 할 일은 요리라는 것을. 그것은 일종의 고향과도 같은 것이다. 나의 근원이자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향. 레미가 진정 특별한 이유는 그 누구보다 요리를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보수적인 생각일 수 있음을 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해야 한다.'라는 말 자체가 폭력이며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레미는 요리를 '하고 싶은' 것이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어찌 쉽게 결론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 레미는 요리를 해야 하는 존재인 듯 보인다. 적어도 이 이야기를 만든 이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고 싶다', '잘 한다', '해야 한다'는 모두 다른 층위의 문제이며 이것을 한 번에 엮어버릴 경우 인생의 경로설정 혹은 인생관 자체가 불건전해질 수 있음에 우리는 언제나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이러한 주제 너머에 숨어 있는 '왜?'라는 질문에 마주해야 한다. 결국 이 영화는 한 마리 쥐의 일생이 아닌 우리 인간들의 일생을 논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왜 무언가를 하고 싶으며, 왜 무언가를 잘 하며, 왜 무언가를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