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의 어느날, TV에서 영화 <매트릭스>를 방영해줬다. 방송국은 아마도 SBS.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조차도 <매트릭스>는 알고 있었다.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온갖 패러디가 인터넷에 범람하기 시작했는데, '니들이 게맛을 알어?', '아햏햏', '오인용' 같은 패러디물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중 <매트릭스>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패러디의 단골소재였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 존재를 알수 있었다.


영화를 본 사람은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이었다. 워낙에 영화를 좋아하는 엄마와 우리 형제는 곧잘 함께 영화를 보곤 했다. 동시대에서 몇 차원 앞선 컴퓨터그래픽과 초등학생이 받아들이기엔 충격적인 설정에 압도되어 영화를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장면은 이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매트릭스 세계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부분이 되었다. 기계에 정복당해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인류의 그 참담함이란... 이제 열 살 갓 넘은 꼬마의 가슴을 얼마나 섬짓하게 했을지 여러분은 상상이나 가시는가.


그때 동생이 갑자기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 곧이어 와지끈,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엄마와 내가 방에 가 보니, 동생이 컴퓨터를 부수려 드는 게 아닌가. 그것도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동생을 제지시키고 왜 그랬냐고 물으니 아직도 눈물을 멈출 수 없는 동생이 말하길,

-이 기계녀석들이 우리를 정복할 거야! 기계들을 모두 부숴버려야 해...

라는 거였다. 그렇다. 매트릭스의 암울한 비전에 감화된 내 동생은, 기계문명이 초래할 재앙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며 심각한 기분에 젖어 있었던 엄마와 나는 배를 잡고 웃었고,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존 코너 뺨치는 용단을 보여준 내 동생은 이렇게 또 하나의 전설을 기록했다.


그렇게 순수했던 내 동생도 이제는 때가 많이 묻었을 게다. 컴퓨터를 결딴내려던 그 꼬마가 이제는 컴퓨터를 활용하는 작업에 도사가 다 되었다. 어딜 가나 그 무거운 노트북과 태블릿을 이고 다닌다. 기계문명의 대항마가 완전히 투항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내 동생은 천진하고 순진한 축에 든다고 자신한다. 근데 이게 뭐라고 자신이라는 표현까지 쓰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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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lon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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